우연히 구세군을 다시 만난 곳은 거리도, 광장도 아닌 공연장이었다. 지난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람한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 무대 위에서였다.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제목보다 ‘스크루지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야기다.
공연장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크리스마스트리와 방울들, 무엇보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연말의 기분이 전해졌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린 시절 너무 자주 접한 이야기였다. 구두쇠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이브 밤, 유령들과 함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하고 돌아와 개과천선한다는 줄거리를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공연 속 스크루지는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스크루지와 달랐다. 기억 속 그는 엄청난 폭리를 취해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였다. 하지만 뮤지컬 속 스크루지는 달랐다. 인색했지만, 부당한 폭리를 취하는 사채업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근면하고 검소했다. 쾌락도 멀리하는 금욕주의자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서는 청교도적 가치에 충실한 인물이랄까.
그렇다고 작품이 스크루지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인간적인 온정이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인물이다. 정직하고 정확하지만, 그의 계산 속에는 타인의 고통이 빠져 있다. 뮤지컬은 디킨스가 그린 결말을 그대로 따른다. 스크루지는 변하고, 이야기는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다행이다. 그가 개과천선해서. 좋은 작품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아주 미세하게라도 변화를 준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문득 올해 거리에서 들리지 않던 그 종소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구세군의 종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귀 기울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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