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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2 (월)

    [新 광수생각]‘싸구려’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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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광수네복덕방 대표·명지대 겸임교수

    주택 공급, 도서관 건립…공공재는 효율성만 최우선

    삶의 질·편리성 개선 힘써 민간재와 경쟁 가능해질 때

    서민의 삶도 더 풍족해져

    [이광수 광수네복덕방 대표·명지대 겸임교수] 우리말 ‘싸구려’는 직관적이다. ‘싸다’는 형용사에 특정한 속성을 지닌 대상이나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종결 어미 ‘-구려’가 붙었다. 말 그대로 값이 싼 물건, 혹은 그만큼 질이 낮아 천대받는 대상을 일컫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싸다’는 것은 종종 미덕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이나 삶의 질과 연결될 때 그것은 비루함과 동의어가 된다.

    이데일리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국토교통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 날 선 단어를 꺼내 들었다. “공공임대 주택은 왜 늘 도시의 구석진 곳, 가장 안 좋은 자리에 ‘싸구려’처럼 지어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그의 지적은 뼈아픈 현실을 관통한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택지를 공급할 때 교통이 편리하고 볕이 잘 드는 알짜배기 땅은 비싼 값에 민간에 분양하고 공공임대주택은 도시의 외곽이나 자투리땅으로 밀어내곤 했다.

    그 결과 대중의 머릿속에 공공임대주택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질 낮은 주거지’, ‘피하고 싶은 동네’라는 등식으로 각인됐다. 정책 입안자들이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공공의 주거를 ‘싸구려’로 전락시킨 것이다. “역세권 가장 좋은 곳에 공공주택을 지으라”는 대통령의 주문은 단순한 입지 선정을 넘어 공공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요구다.

    도시는 크게 두 주체가 공급하는 재화로 채워진다. 공공과 민간이다. 이 둘은 태생적인 목적이 다르다. 공공은 국민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고 민간은 ‘돈이 되는’ 것을 만든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공공은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효율성과 비용 절감이 최우선 가치가 된다. ‘비를 피할 곳만 있으면 되지’, ‘책만 빌릴 수 있으면 되지’라는 식의 접근은 공공재의 품질을 하향 평준화시킨다. 반면 민간은 다르다. 그들은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더 화려하게, 더 편리하게, 더 고급스럽게 지어 비싼 값을 받으려 한다.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긴다. 이윤 추구가 역설적으로 재화의 질적 향상을 견인하는 것이다.

    이 작아 보이는 차이가 도시에 거대한 격차를 만든다. 공공 도서관이 칙칙하고 낡아가는 동안 민간이 운영하는 유료 독서실과 스터디 카페는 호텔 로비처럼 화려해진다. 공공 임대주택이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방치될 때 민간 브랜드 아파트는 최고급 커뮤니티 시설을 자랑한다. 이 격차 속에서 시민은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공공은 싸구려다. 내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공을 벗어나 민간이 제공하는 비싼 재화를 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불안’의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공공 영역이 초라하고 빈곤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사적 자산을 축적하는 데 목숨을 걸게 된다.

    생각해 보라. 만약 집 앞의 공공 도서관이 웬만한 대형 서점이나 사립 도서관보다 쾌적하고 아름답다면, 굳이 비좁은 집에 거대한 서재를 꾸미려 애쓸 필요가 있을까. 동네마다 있는 공공 수영장과 체육관이 5성급 호텔 리조트 보다 훌륭하다면 수억 원의 회원권을 사거나 아파트 단지에 고급 수영장을 파려는 욕망이 생길까. 대중교통이 일등석처럼 안락하다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과시용 고급 승용차를 모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공적인 영역이 훌륭하면 개인은 사유재산에 덜 집착하게 된다. 공공재가 압도적인 수준의 질적 만족감을 줄 때 개인의 소유욕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는다. 반대로 공공 영역이 무너지면 돈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돈에 집착하고 투기에 내몰린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부동산 불패 신화와 부채의 늪은 어쩌면 우리의 공공재가 너무나도 ‘싸구려’였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비극일지 모른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던진 화두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대한민국에 ‘싸구려’ 딱지를 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최고급 공공주택이 도심 한복판에 들어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임대주택에 산다’는 것이 가난의 증명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무리하게 영혼까지 끌어모아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사지 않아도 국가가 제공하는 주거 환경에서 충분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면 대한민국을 짓누르는 가계부채와 저출산 문제의 실타래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사적 영역의 비대함만을 키워왔다. 이제는 공적 영역의 ‘품격’을 논해야 할 때다. 공공건축물 하나, 공원 벤치 하나에도 심미적 가치와 최고의 품질을 담아야 한다. 그것이 세금 낭비가 아니라 시민의 불필요한 경쟁 비용을 줄여주는 가장 효율적인 복지다.

    필자는 지금 인천의 한 평생학습관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통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고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이곳의 풍경은 시내의 여느 고급 프랜차이즈 카페 못지않다. 하지만 이곳의 유자차 한 잔 가격은 단돈 2000원이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공간이 주는 가치는 결코 싸구려가 아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의 얼굴에는 여유와 환한 미소가 감돈다. 공공이 제공하는 훌륭한 공간이 시민에게 어떤 위안과 자부심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다.

    오래전 시인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이제 우리는 그 외침을 이어받아 “싸구려는 가라”고 외쳐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혜적 차원의 ‘값싼 공공’은 이제 끝내야 한다. 가장 좋은 곳에, 가장 좋은 자재로, 가장 아름답게 지어진 공공재가 우리 삶을 감싸안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유재산의 노예가 아닌 품격 있는 공동체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공(公共)이 명품이 될 때, 비로소 시민의 삶도 명품이 된다. 2000원 유자차가 매우 달콤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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