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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안병억의 브뤼셀의 창] 미국 압력에다 저성장 탈피 위해 ‘AI 규제법’ 속도 조절하는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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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내가 당신을 만들었소? 아니면 당신이 나를 만들었소?”

    완전무결한 로봇을 만들어 작동시켰더니 로봇이 대뜸 제작자인 과학자를 도발했다. 미국의 공상과학(SF)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에 나오는 말이다. 챗 GPT가 나온 지 3년이 지났고 인공지능(AI) 기업의 대규모 투자와 주가의 고공행진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그런데 정작 어디까지 AI를 허용할 것인가란 근본적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계 첫 AI법 제정·적용한 EU

    ‘AI 고위험 조항’ 적용 연기할 듯

    미국과 규제 갈등은 이어질 전망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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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로 AI법을 제정한 유럽연합(EU)조차 내년 8월부터 발효 예정인 일부 법 조항을 1년 넘게 연기하려 한다.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과 과도한 규제에 대한 유럽 내부의 반발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모프의 문제 제기처럼 인류에게 봉사하는 AI가 되게 하려면 규제는 꼭 필요하다. 혁신과 규제의 적절한 균형 잡기다.

    ‘안전한 AI 사용’을 정체성 삼는 EU

    EU의 AI법은 지난해 8월 1일부터 단계적으로 발효됐다. AI 사용에 따른 위험을 4단계로 구분해 단계별로 상이한 규제를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최고 위험 단계’(용납할 수 없는 리스크)는 범죄 행위를 저지를 위험을 평가 또는 예측하는데, 직장이나 교육기관에서의 감정 인식에 AI 사용을 금지한다. 지난 2월부터 발효됐다. 반면 내년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고위험(high-risk) 규정’에 대해서는 EU 집행위원회가 2027년 12월, 일부는 2028년 8월까지 연기를 제안했다.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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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위험 조항은 건강이나 안전, 기본권에 심각한 리스크를 제기할 수 있는 분야에서 AI를 사용하려면 사람의 감독이 필요하고 기본권 침해 등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근로자 채용이나 관리, 필수적인 민간 및 공공서비스 접근 등에 AI를 사용할 때 적용된다. 신용점수 평가나 소송 준비, 증거의 신뢰성 평가에 AI를 사용할 때 해당한다. EU에서 행정부 역할을 하며 입법을 보조하는 집행위원회가 법 개정을 제안한 만큼 입법기구인 유럽의회와 각료이사회에서 개정에 합의해야 한다.

    EU는 세계 최초로 ‘AI 규제법’을 만들어 시행 중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AI를 안전하게 사용 중임을 표기해 투명성을 제고하고 기본권을 존중하며 리스크에 기반을 둔 혁신을 촉진하려 했다. AI 개발에 우선순위를 두는 미국과 중국과는 대조된다. AI 규제법은 EU에서 영업 중인 기업뿐만 아니라 역외에서 EU에 AI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관련 제품을 유럽에 판매하는 기업에도 적용된다. 일본이나 브라질,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EU를 따라 ‘AI 사용 명시’를 규정한 법을 시행 중인 이유다. EU의 규제는 파급 효과가 크다.

    EU가 AI 규제의 글로벌 틀을 세우려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EU에 관련 규제 완화를 압박해 왔다. 이달 초 발표된 국가안보전략에서 미국은 EU를 ‘규제 질식 지역’으로 규정하며 EU 기구가 주권을 침해한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집행위원회가 메타나 X 등에 독과점 위반과 데이터 투명성 부족을 이유로 대규모 벌금을 부과한 것을 집중 비판했다. 취임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2000억 달러가 넘는 무역흑자를 기록 중인 EU를 겨냥해 “EU는 미국을 망가뜨리려는 조직”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대 EU 규제 완화 요구에 편승해 EU 회원국인 프랑스·독일 및 대기업도 EU 집행위원회에 AI법의 시행 연기를 계속 요구했다. AI 규제법을 지키려면 많은 인력과 추가 비용이 들어가는 데다 규제의 필요성에도 법이 과도한 탓에 미국이나 중국 등과의 AI 경쟁에서 매우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AI법 연기에 대한 공은 유럽의회로 넘어갔다. 의회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 등 의회 내 중도 좌파 정당은 이행 연기를 반대한다. 이들은 EU가 AI법으로 ‘AI 거버넌스’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의제 설정자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반대로 유럽인민당 같은 중도 우파는 관련 기술 표준이나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아직 없다며 시행 연기를 지지한다. 다만 EU가 저성장 탈피를 위해 친환경 정책 일부 완화에 나서는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규제 완화로 가는 만큼 AI법의 일부 규정 시행은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

    EU를 압박하는 미국도 내부적으로는 AI 규제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AI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연방정부가 AI 진흥 틀을 만들고 50개 주가 개별적으로 AI를 규제하지 못하게 하는 게 핵심이다. 각 주가 연방 정책과 배치되는 AI법을 만드는지 연방 법무장관이 검토·제소하도록 했다. 지난 7월 같은 내용의 법 제정을 시도했지만 상원과 하원에서 다수당인 공화당 일부 의원이 반대하자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중국과 ‘AI 군비 경쟁’ 승리 노리는 미국

    이에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이 명령이 주의 권한을 침해했다며 소송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서도 AI 규제를 지지하는 쪽이 많다. AI가 만드는 일자리보다 AI로 인해 발생하는 일자리 상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익 극대화가 목표인 빅테크와 한 몸이 되어 규제를 배제한 채 AI 진흥에 열을 올린다. 중국과의 ‘AI 군비 경쟁’에서 선한 세력인 미국이 승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미국은 EU에 부과한 관세를 최대 15%로 제한하기로 합의했지만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서는 50% 관세를 고수하고 있다. 관세 인하의 조건으로 미국은 EU의 친환경 및 AI 정책 규제 완화를 계속 요구해왔다. 하지만 규제 강대국인 EU가 미국의 압박에 규제 카드를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의 규제 갈등은 지속할 듯하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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