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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장혜수의 시선] 남겨서 또는 지워서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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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장혜수 스포츠선임기자


    헤어진 대상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가 누군지, 그와 함께한 시간이 어땠는지, 헤어진 이유가 뭔지 등에 따라 제각각일 터다. 그중 스포츠 쪽에서 많이 사용하면서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남겨서 기억하기, 다른 하나는 지워서 기억하기다. 사실 전자는 스포츠 분야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익숙한 방식이다. 남겨서 기억한다는 건 일단 용어부터 직관적이다. 반면 후자는 용어부터 모순적이다. ‘지운다’와 ‘기억한다’가 서로 호응하나. 지워서 기억한다니, 어떻게.



    손흥민 벽화 남겨 기억한 토트넘

    등 번호 지워 기억하는 영구결번

    남기든 지우든 기억에 남을 한 해

    먼저 남겨서 기억하기를 보자. 연말의 연례행사 중 하나가 ‘10대 뉴스’ 선정이다. 한 매체가 최근 ‘올해 국내 스포츠 10대 뉴스’를 선정해 발표했다. ‘손흥민, 유럽서 15년 만에 첫 우승 후 미국으로 전격 이적’이 1위다. 이적설이 나도는 내내 토트넘 홋스퍼 구단 태도가 마뜩잖았다. 10년간 그렇게 열심히 뛴 선수인데, 우승 트로피를 찾아 떠난 누군가와 달리 끝까지 팀을 지킨 선수인데, 그리고 결국은 팀에 17년 만의 메이저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긴 선수인데. 그런데도 붙잡지 않고 떠나 보낸다고. 결국 손흥민은 미국프로축구(MLS) 로스앤젤레스(LA) FC로 이적했다. 동상은 몰라도 공덕비 하나쯤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소속팀(LA FC)과 국가대표팀의 연말 일정을 마친 손흥민이 지난 10일 영국 북런던 토트넘 홋스퍼 구장을 찾았다. 옛 동료와 팬도 만나고, 다큐멘터리(지난 17일 공개된 ‘손흥민: 홈커밍’)도 촬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구장 가는 길에 남겨진 벽화 앞에 섰다.

    벽화 위치는 토트넘 홋스퍼 구장 앞 메인도로인 하이로드의 3층 건물 벽면이다. 전문업체(머월스)가 손흥민의 토트넘 방문 직전 일주일간(3~9일) 제작했다. 상징 포즈인 ‘찰칵 세리머니’ 모습과 허리에 태극기를 감고 우승 트로피를 든 모습, 한글 이름 등이 벽을 장식했다. 1882년 창단해 143년 역사를 이어온 토트넘 구단이 벽화로 남긴 선수는 3명이다. 레들리 킹과 해리 케인, 손흥민. 킹은 팀의 유일한 원클럽맨이고, 케인은 팀 통산 최다골 선수다. 둘 다 잉글랜드인이자 토트넘 유스팀 출신이다. 잉글랜드인도 유스팀 출신도 아닌 손흥민을 토트넘은 벽화로 남겼다. 스포츠는 그렇게 헤어진 누군가를 남겨서 기억한다.

    지워서 기억하기 차례다. 지난 13일 안양아이스링크에서는 아이스하키 아시아리그 HL 안양과 닛코 아이스벅스의 경기가 열렸다. 안양이 4-3으로 승리한 이 경기 직후 은퇴식이 열렸다. 행사 주인공은 지난 4월 스틱을 내려놓은 안양의 전 골리 맷 달튼이다. 지난 2014년 한국에 온 그는 은퇴까지 안양과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 골문을 지켰다. 아시아리그 9시즌을 뛰며 안양이 정규리그에서 6차례, 챔피언결정전에서 7차례 우승할 때 최후방을 사수했다. 2016년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한라성’이라는 이름의 국가대표팀 골리로 활약했다. 그가 대표팀 골문을 지킨 2017년 한국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에서 2위를 차지해 이듬해(2018년)에 월드챔피언십(톱 디비전)에 진출했다. 은퇴식 하이라이트는 안양에서 그가 달았던 등 번호 ‘86번’을 지우는 영구결번식이었다.

    1939년 미국프로야구(MLB) 뉴욕 양키스 4번 타자 루 게릭는 ALS(근위축성측삭경화증, 일명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은퇴했다. 이듬해 은퇴식에서 에드 배로 양키스 단장은 “루가 입었던 4번 유니폼은 앞으로 아무도 입을 수 없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스포츠사에 기록된 첫 영구결번이다. 한국도 첫 영구결번은 프로야구다. 1986년 불의의 사고를 사망한 포수 김영신을 추모하기 위해 OB 베어스(현 두산)가 그의 등 번호(54번)를 영구결번했다. 영구결번엔 망각이 아니라 예우와 기억의 의미가 담겼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배구 김연경의 10번, 야구 오승환의 21번, 축구 최철순의 25번을 영구결번했다. 스포츠는 그렇게 헤어진 누군가를 지워서 기억한다.

    올해가 일주일 남았다. 이맘때면 한 해를 돌아보는 뉴스에서, 각종 연말 행사장 축사나 건배사에서, 지인끼리의 송년회에서 무시로 등장하는 말이 ‘다사다난’이다. 다들 많았던 일(다사)과 많았던 어려움(다난)을 털어내거나 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고 한다. 그런데 세상일이 꼭 그렇게 맘먹고 말하는 대로만 되나. 좋든 싫든 기억하고 가야 할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스포츠가 헤어진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시기를. 남길 수도, 지울 수도.

    장혜수 스포츠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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