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유엔 무용론’
어젠다 장악도 약해졌지만
분쟁·빈곤 해결한 80년
유엔사는 한반도 유사시
우리 도울 ‘전가의 보도’
불화하지 말고 존중해야
9월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 총회. 올해는 유엔 창립 80주년이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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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엔 창립 80주년이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내가 취임 7개월 동안 7개의 분쟁을 중재해 끝냈지만 유엔은 어떤 잠재력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힐난했다. 57분간 이어진 독설은 유엔 잔칫날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또 “지구온난화는 사기극”이라며 유엔이 주도하는 환경 등 다자주의 외교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이런 ‘유엔 때리기’ 분위기 속에서도 유엔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산 15%, 인원 18% 감축 등 강도 높은 개혁에 안간힘을 쏟고 있으나, 트럼프라는 거센 파고 앞에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더욱이 유엔 예산의 22%를 부담하고 있는 미국이 2025년도 분담금을 체납해 유엔 사무국은 패닉 상태라고 한다.
유엔은 지난 2000년 코피 아난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절대 빈곤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MDG(새천년개발목표)를 출범시켰고, 반기문 사무총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사회∙경제를 연계하는 SDG(지속가능발전목표)를 국제사회의 핵심 어젠다로 정착시켰다. 유엔이 보여준 이러한 어젠다 장악력과 비교하면, 최근의 유엔은 사면초가에 놓인 채 크게 위축된 모습이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트럼프식 ‘유엔 무용론’에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PEW 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4%가 유엔을 지지한다. 민주당 지지자 82%, 공화당 지지자 43%로 양당 간 편차는 크지만, 미국인의 3분의 2가 유엔을 지지하는 셈이다. 세계적으로는 서방 주요 25국에서 61%가 유엔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 높은 지지율의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유엔의 가장 큰 설립 목적은 3차 세계대전 방지다.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류는 세계대전을 겪지 않았다. 일단 존재 이유를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9000만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된 비극적 경험이 유엔 창설의 출발점이었다. 2대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는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설립됐다”며 유엔의 존재 이유를 실감 나게 설명하고 있다.
둘째, 유엔은 창설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국제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도전에 적극 대응해 왔다. 71개 분쟁 지역에 평화유지임무단(PKO)을 파견했고, 국가 주권 원칙에 대한 예외 시도(국제형사재판소, 인도주의를 위한 무력 개입 R2P 등), 그리고 기후변화, MDG와 SDG 같은 인류 사회의 새로운 플랫폼을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유엔은 국제사회에서 버림받거나 소외된 아프리카 대륙과 최빈국의 분쟁과 절대 빈곤 해결에 예산과 인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며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을 힐난하면서도 막상 유엔을 탈퇴하겠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차기 유엔 사무총장 선출을 목전에 두고 유엔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후임 사무총장이 중국과 러시아에 경도되지 않도록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독자적인 세력화를 노리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의 끈질긴 도전을 앞두고 ‘안보리 거부권’이라는 특권을 포기할 리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유엔 창설 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안보리 제재’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유엔이 당초 구상한 초국가적 권위를 가진 ‘유엔군’을 출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안의 하나로 도입한 것이 바로 ‘안보리 제재’다. 안보리 제재의 성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18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적극 나선 것도 대북 안보리 제재 해소가 절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지난해 러시아가 대북 제재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대북 제재 시스템의 ‘CCTV’를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북 제재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됐음을 의미한다.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제19회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기념식이 열린 11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용사와 유가족 등이 1분간 묵념하고 있다. /부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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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0년 동안 한국과 유엔 관계를 돌아보면 유엔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분명해진다. 1948년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2년 후 1950년 6·25전쟁 발발 시 신속한 유엔군 개입으로 한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냈다. 북한 핵 위협의 고도화로 한반도 안보가 다시 위협받고 있지만, 1950년 안보리 결의 84호에 근거한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가 한반도 유사시 다시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있는 국제법적 장치가 구비돼 있는 점은 큰 다행이다.
유엔사는 정전 체제 유지·관리가 기본 업무다. 하지만 한반도 유사시 일본에 있는 7개 유엔사 후방 기지의 신속한 동원은 물론, 1953년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 기초한 유엔사 회원국들의 한반도 참전을 원활하게 하는 중차대한 임무도 수행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DMZ 내 우리 측 인사의 방문 문제가 자칫 유엔사와 한국 간의 불화로 비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일단 전세계약이 체결된 후에는 집주인이 자신이라 해도 마음대로 전셋집 문을 따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유엔이라는 거대한 국제적 안전판의 중요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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