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태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은 후 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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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사태로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뒤집고 재판 불신을 초래한 양 전 대법원장에게 형사 책임을 물었다. 1, 2심 판단이 엇갈린 가운데, 직권남용 법리에 대한 최종 판단은 대법원이 내린다.
서울고법 형사14-1부(재판장 박혜선)는 지난달 30일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의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해 1심의 무죄 판단을 뒤집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고영한 전 대법관에겐 1심과 같이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 불신 초래했다면, 직권남용”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법관의 재판권이 방해받았다고 봤다. 앞서 1심은 법관의 재판권은 독립적이므로, 사법행정권이 이를 침해할 수 없다고 전제했다. 양 전 대법원장에겐 사법행정권만 있을 뿐, 개별 재판에 관여할 직무권한이 처음부터 없기에, 남용도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항소심은 사법행정권만으로도 법관의 재판권을 방해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법관이 재판의 주체이면서도, 사법부 공무원으로서 이중적 지위를 가진 데 주목했다. 법관이 법원행정처 지시를 따르는 공무원인 이상, 개별 재판에 미치는 영향을 딱 잘라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자가 형식적, 외형적으로 그 직무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재판 관여 행위를 하는 경우, 개별 법관으로서는 이중적 지위 중 어느 지위에서 대응해야 하는지 언제나 분명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의 남용으로 개별 재판의 신뢰성이 흔들렸다면, 이는 법관의 재판권 행사를 실질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법관의 속마음은 재판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재판의 공정성은 형식에 크게 의존한다고 봤다. 그런데 보고서 검토 등 권유의 형식을 띤 사법행정권 남용만으로도 재판 당사자들은 불신을 가질 수 있고, 이는 결국 법관의 공정하게 재판할 권한 행사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죄로 처벌하려면, 재판 개입이 실제 법관 판단에 영향을 끼쳤는지 구체적으로 입증해내야 한다는 원심 판단을 정면 반박했다.
임성근 대법 판례 “확립된 판례라고 보기 어려워”
1심 재판부가 인용한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대법 판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직권남용죄의 구성요건 해석에 관한 대법원의 일반적이고 확립된 판례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당시 대법원은 임 전 수석부장판사가 부당하게 재판에 관여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직권남용죄는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 관여 행위가 직무권한에 해당하지 않고, 법관의 구체적 권리행사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실제 재판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는 인과관계도 입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판례를 반박하기 위해 직권남용죄에 대한 다른 대법 판례 5건을 인용했다. 처음부터 문제 되는 행위가 직무권한에 해당하는지 따지기보다, 상급자에게 일반 직무권한이 있는지 판단한 뒤 이 형식을 빌려 부당한 지시를 했는지 따져야 한다는 취지다.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직권남용 대법 판례를 주요 근거로 들었다. 당시 이 사건 1심 재판부도 사찰 행위는 국정원 직원의 일반 직무권한이 아니므로 직권남용 구성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 전 원장의 부당한 지시가 외관상 직권 행사의 모습을 갖췄으므로, 직권남용이 성립한다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나머지 4개 판례도 상급자가 일반 직무집행의 형식을 갖춘 채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면,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재판부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쓰였다.
대법, 직권남용죄 법리 다시 판단해야
양 전 대법원장 측은 항소심 판단이 기존 직권남용 판례에 반한다고 반발했다.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은 선고 직후 “대법원에서 당연히 무죄로 결론이 바뀔 거라고 확신한다”며 상고를 예고했다. 대법은 사법행정권의 직무권한을 넓게 판단한 항소심 법리를 최종적으로 따질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이 항소심에서 유죄로 인정받은 재판 개입 혐의는 2개다. 2015년 4월 사립학교법 관련 재판을 하던 서울남부지법 민사11부의 한정 위헌 취지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막은 혐의와 2015년 11월 옛 통진당 국회의원들이 낸 지위확인 소송 항소심에 개입한 혐의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 등 45개 혐의는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현직 사법부 수장 중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이 처음이다. 양 전 대법원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9월 15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해 상고 사건과 인사 적체 해소를 위한 해결책으로 ‘상고법원’을 내세웠다. 하지만 임기 내 무리하게 이를 추진하다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졌고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2019년 2월 기소됐다. 2024년 1월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 등 부정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와의 관계에서 사법부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과정에서 이 사건 범행에 이르렀다고 해도, 재판의 독립이 훼손되고 공정한 재판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초래됐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혐의가 대법원에서도 유죄로 판단되면 사법개혁 요구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 당시 재판 개입과 인사 불이익의 통로로 꼽힌 법원행정처도 개혁 대상이 될 수 있다.
임현경 기자 hyl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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