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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4 (화)

    이슈 세계 속의 북한

    어릴때도 전쟁, 노년도 전쟁…“우리가 북한에 무얼 잘못했나”[러·우크라전 북한군 파병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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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고려인 사회의 혼란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한 커피 전문점 구석진 창고에 여러 사람이 모였다. 박스 테이프를 붙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식료품과 생필품을 연신 박스에 담고 있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사는 고려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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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고려인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나 크림반도 오데사는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이었다. 많은 고려인들이 폭격을 피해 피난을 떠냐야 했다. 수도 키이우나 서부 지역으로 삶터를 옮겼지만 곧 경제적인 문제에 부닥쳤다. 주거와 일자리 등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해져 버린 것이다.

    도네츠크에서 온 고려인 피난민 세르게이 히가이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몇 년째 타향을 떠돌고 있다. 그는 “조부때부터 살던 고향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왔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현실에 너무나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루드밀라 김은 “나는 자포리자 지역의 점령된 도시 출신”이라며 “남편과 손자와 함께 몇 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전쟁이 날 줄 몰랐고, 피난은 어떻게 가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무작정 전쟁을 맞았고, 한순간에 그들의 인생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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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한국에서 오는 식량들이었다. 끝까지 버틸 수 있겠다는 기대를 준 것이다. 고려인 시민단체 ‘아사달’은 한국에서 오는 식량을 고려인 가정에 나눠주는 사업을 한다. 아사달의 대표 페트로박은 “한국 NGO가 보내주는 성금으로 두 달에 한번 정도 고려인 가정에 식료품을 보내준다”며 “그 혜택을 받는 고려인 가정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1950 가구”라고 말했다.

    근방에 있는 고려인 가정들은 직접 식료품 패키지 박스를 받으러 온다고 했다. 그 외 지방에 있는 가정들은 배달을 가야한다고 페트로는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어와 한국어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스티커를 박스에 빼곡하게 붙였다.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때 고려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다들 얼굴에 시름이 많아보였지만 쌓여있는 박스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박스안에는 스파게티면, 설탕, 쌀, 밀가루등 식량들이 들어있다. 루드밀라 박은 “우리 고려 사람은 쌀 없으면 안된다”며 박스 속 쌀봉지를 들어보였다.

    페트로는 상자를 보여주며 “각 세트에는 14개의 품목이 들어 있다”며 “통조림, 설탕, 파스타, 오일, 소시지, 쌀, 차, 그리고 치약 등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9,10월 두달간 페트로씨는 858세트를 각 가정에 전달했다. 그는 “전쟁이후 한 가정에 50달러정도의 연금 수입밖에 없는 고려인들이 부지기수”라며 “이들에게 이 식량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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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의 고려인을 지칭하는 공식 명칭은 ‘고려사람(Корё-сарам)’이다. 올렉시 김(62)씨는 “소련 시절 여권에는 ‘조선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우리는 (스스로를) 소수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지금 한국 민족은 매우 크고 발전된 나라를 갖고 있고, 내가 그들과 같은 민족인 ‘고려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김은 “나는 여전히 한국인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에서 살았던 고려인 3세대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의 조부모님은 1937년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로 강제이주 당했고,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가 태어났다. 그도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고려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박스를 하나씩 받은 20여명의 고려인들은 인증 사진을 찍고 서류에 사인을 했다. 한국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는 증명을 위해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들은 서둘러 박스를 들고 떠났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 키이우에는 공습 경보가 울리고 탄도미사일과 샤헤드 드론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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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로는 트럭에 다른 박스들을 실었다. 수도 키이우 외 지역에도 식량박스를 기다리는 고려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시간 운전을 해야하는데, 길이 아주 위험하다. 드론이 공격하기도 하고 미사일이 날아오기도 한다. 위험천만한 길을 페트로는 4년 가까이 배달하고 있다.

    그가 6시간을 걸려 운전해 도착한 지역은 하르키우시였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전쟁 최대 격전지이다. 하르키우 외곽의 많은 지역이 이미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다. 시내는 우크라이나 정부 통치에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르키우 시내로 들어서자 마자 폭격에 무너진 건물들이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트로는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많은 대학이 있고, 공원도 매우 흥미롭고, 볼 것도 많다”며 “지금 이 도시에 들어갈 때면 전쟁 전 모습이 떠올라 매우 슬프다”고 말했다.

    페트로가 한 식당 앞에 트럭을 주차하자, 한 무리의 고려인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힘을 모아 트럭에서 박스를 내렸다. 하르키우 고려인 사회의 반장 격인 스베틀라나씨는 장부를 들고 나와 사람들에게 박스를 나눠주며 인증샷을 찍었다. 그는 “하르키우에 고려사람이 아주 많다”며 “오늘 이 박스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다”고 말했다.

    페트로 트럭에는 식료품 박스 외에도 오리털 패딩점퍼, 감기약 등 한국의약품, 장갑, 스케치북 등 한국에서 보내준 다양한 원조품이 있다. 알렉산드라는 “음식뿐 아니라 치약, 비누, 샤워 젤 등을 제공해 준주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인 나탈리아는 “1938년생인 어머니는 ‘나는 전쟁 속에서 삶을 시작했고, 지금 삶을 마무리하는데 또 전쟁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며 “어린 시절도 전쟁, 지금 노년도 전쟁”이라며 울먹였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고려인들에게 노년의 전쟁은 더욱 서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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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의 함박웃음도 잠깐, 이내 날카로운 공습 경보가 울렸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 할머니는 손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괜찮아 괜찮아”라며 달랬다. 박스를 받아든 사람들은 시내 한가운데 있는 것은 위험하다며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페트로는 “사람들은 시내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어서 박스를 나눠주고 나도 시내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4년째 계속되면서 이제 이런 일상도 이들에게는 익숙해 보였다.

    발길을 재촉하는 고려인들 중 테티아나가 있다. 그는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싱글맘이다. 남편은 행방조차 알지 못한다. 전쟁이 난 뒤 어디서 징집이 되었는지 혹은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채 2년이 흘렀다고 한다. 한국말을 잘하는 그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그는 “조부모님은 극동 사할린에 살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됐고, 이후 계속 살았다”고 말했다. 테티아나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로 다시 이주했고 크림반도의 세바스폴은 고향이 됐다.

    러우 전쟁 이후 폭격을 피해 피난 온 곳이 시댁이 있던 하르키우였다. 남편이 실종되고 수입이 전혀 없는 그녀는 친구가 해외로 피난가며 비워놓은 아파트로 옷가지 몇 개와 아이들 장난감을 들고 찾아갔다. 방 하나와 주방, 그리고 욕실뿐인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에게 한국어 온라인 수업을 하거나 리본으로 만든 자그마한 수공예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수입은 한달에 2000 흐리브나 (한화 약 7만원)가량이다. 11살, 7살 딸 둘을 키우기에 턱없이 적은 액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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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나마 아이들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며 “언제 어디에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곁에 없으면 나를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폭발음이 들렸을 때 큰 딸은 천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을 겁주지 않기 위해 ‘전쟁이고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나 혼자 이걸 감당하고, 아이들은 모든 게 괜찮다고 느끼도록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르키우는 하루에도 열댓번 공습경보가 울린다. 그때마다 테티아나는 방과 현관사이에 있는 좁은 복도에서 아이들을 안고 토닥였다. 아이들은 익숙하게 엄마에게 안겨서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렸다. 의지할 곳없는 그들 모녀가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이다. 그는 “북한군이 쿠르스크 근처에 있는 걸로 안다”며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북한군 파병은 고려인 사회에 큰 혼란을 줬다. 남한은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 북한은 빈곤한 독재국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북한군 파병은 두개의 한국이 극단적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됐다.

    드네프로시에서 영토방위군 상사로 복무중인 블라드미르 김은 “그들(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며 “나는 여기에 살고 있고, 그들은 우리 나라에 왔다. 나는 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북한군이 러시아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하게 한다”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나는 우크라이나 한국인, 그들은 북한에서 온 한국인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한국인이라 속상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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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로는 “벌써 전쟁 4년째라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아주 지쳐 보이고, 조금은 낙담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며 “하지만 한국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기억을 해주는 덕에 우리는 하나의 피, 한국어라는 하나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테티아나는 취재를 치고 떠나려는 취재진에게 한국에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정말 ‘평화로운 하늘’을 잃어본 사람은 ‘평화로운 하늘’이라는 말이 왜 필요한지 안다”며 “밖에 나갔을 때 머리 위로 아무것도 안 날아다닐 때”고 말했다.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고려 사람’의 전쟁은 언제 끝날까.

    정리=박병률 기자

    키이우(우크라이나) 김영미 국제분쟁전문PD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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