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아사드 라자의 ‘흡수’ 경작자 팀이 흙을 돌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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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다이아몬드가 비싼 값어치를 인정받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성질이다. 광물뿐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많은 물건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잃는다. 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많은 유물과 미술관에 걸린 많은 미술품도 다르지 않다. 후대의 평가가 바뀌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상태가 얼마나 변하지 않았느냐가 유물이나 미술품의 가치를 좌우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소장·전시품이 갈라지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온도와 습도, 빛의 양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 주력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소멸의 시학 : 삭는 미술에 대하여’는 미술품과 가치,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에 의문을 던진다. 시간에 따라 변질하는 작품도 가치가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썩다, 상하다’ 대신 ‘삭다(Sak-da)’라는 말이 전시 명에 내걸렸다. 김치나 장 같은 발효식품처럼, 시간이 지나 상태가 변하면서 제맛을 찾는 미술품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전시공간 초입부에 깔린 흙이 ‘삭다’라는 말을 곱씹게 한다. 아사드 라자가 기존의 흙에 활성탄, 서울에서 구한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닭 뼈, 은행, 소나무 잎, 이면지, 전선 피복 등을 더해 ‘네오 소일’(neosoil)을 만들었다. 사전에 공모한 경작자들이 전시공간에서 라자의 흙을 도구로 골라내고, 이를 관람객에게 나눠주는 것까지가 그의 작품 ‘흡수’(2026)다. 관람객이 밟을 때마다 소리 없이 푹 파여 발자국을 내는 흙은, 미생물이 서울의 부산물과 상호작용하며 묘한 향을 뿜어낸다. 라자는 “흙은 공동체의 경험이 새겨진 아카이브이자 그 토대”라고 했다. 여러 부산물이 삭으면서 흙이라는 한 물질로 돌아가는 과정, 그 결과물을 여러 사람이 나눠 갖는 행위는 모두 ‘공동성’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작품‘분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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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 작가 유코 모리는 과일에 전극을 꽂고 전선을 통해 전등이나 확성기와 연결한 작품 ‘분해’(2025)를 선보이고 있다. 전극은 과일 속 수분을 변화를 측정하고, 전등은 그 측정치에 따라 점멸하며 확성기도 소리를 낸다. 작품의 제목처럼 과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썩어가지만,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빛과 소리를 낸다. 모리의 작품 옆에는 일본 전통 그림 ‘구상도’가 걸려 있다. 시신이 썩어가는 모습을 아홉 단계로 나눠 그린 이 그림은 일본의 옛 스님들이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는 수행에 쓰였다고 한다. 죽음이 다른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는 일본 불교의 사상은 모리가 ‘분해’처럼 썩어가는 과일로 작품을 만든 계기가 됐다.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에드가 칼릴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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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 과테말라의 마야 칵치켈 부족 작가인 에드가 칼렐은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2021·2026년 재제작)에서 크고 작은 서른 개의 돌 위에 과일과 채소를 올려 놓았다. 칵치켈 부족이 조상에게 지내는 제례를 작품으로 재현했다는 것, 돌 위의 과일과 채소도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는 것 외에 독특한 특징이 있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2023년 이 작품의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칼렐과 그가 속한 부족의 동의가 있어야 전시할 수 있고, 테이트는 이 작품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보호자’를 자청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혹은 수집가가 미술품의 소유권을 갖고, 시장에서의 수요가 있어야만 미술품의 가치가 가격으로 결정된다는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서 전시된 김방주의 ‘벌목과 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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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주는 지난해 8~1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렸던 김창열 회고전에 쓰였던 목재를 전시 공간에 쌓아두고 태워 가며 ‘벌목과 불’(2026)을 보인다. 그는 전시회 후 생긴 폐목재를 집에서 땔감으로 써서 생활하고, 남은 재를 다시 전시장 벽면에 다시 바르고 쌓고 있다. 폐목재를 태워 생긴 재는 죽음과 동시에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폐목재는 전시의 흔적이었고, 남은 재는 나무를 태워 언 몸을 녹이고 따뜻한 식사를 해 먹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국내외 작가 15팀이 다양한 작품 50여점으로, 보존되지 않고 삭아가는 미술품을 통해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전시는 5월3일까지. 관람료 2000원.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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