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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5 (수)

    [공감]AI에 도둑맞은 노동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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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예순두 살의 메리 리처드슨이라는 여성은 세탁기를 처음 돌려본 날의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열두 살 때부터 평생 가정의 세탁을 맡아온 그는 자동으로 물이 흘러들고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기뻐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부터 새벽마다 일어나 얼어붙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피부가 벗겨질 만큼 독한 세제를 만들고, 10시간 넘게 쪼그리고 앉아 손에서 피를 흘리며 빨래를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서였다. 그 시간과 노력이 너무도 분해서였다고 한다.

    인공지능(AI) 시대다. 직장이 사라진다고들 아우성이지만, 실제로 도둑맞은 것은 따로 있다. 우리 노동의 의미다.

    AI의 발달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메리 리처드슨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지금 배우는 기술과 그림, 글쓰기와 외국어가 하루아침에 무용해지는 것은 아닐지. 세탁기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손이 터지도록 독한 비누로 빨래판을 문지르듯, 그럴 필요가 없는데 미련하게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우리에게서 노동의 즐거움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보람을 빼앗아 갔다고 할 수 있다.

    삽질이 아무리 힘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나의 뒷마당이고 한 삽 뜰 때마다 금덩어리가 쏟아져 나온다면 힘들 이유가 없다. 100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인생의 많은 일이 그렇다. 보상이 있거나 분명한 의미가 있다면 육체의 고통은 보람으로 바뀌고, 훗날 돌아볼 추억이 된다. 갓난아이를 키우던 시절을 떠올리는 부모들이 그렇고, 밤을 새워 공부하던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직장인들이 그렇다.

    내가 외우는 단어 하나, 끙끙대며 써 내려가는 문장 하나가 미래로 가는 여정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걸어간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것도 그 여정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생의 끝에 내가 바라던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쏟은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지 모른다는 의심이 우리를 짓누른다. 보람을 앗아가고 있다.

    한참 땅을 팠는데 금이 없었다면,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사기를 당한 것이라면, 그 시간은 추억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무너뜨린다.

    보상이란 돈이나 지위 같은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감사와 인정일 수도 있다. 리처드슨의 세탁 노동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그의 고생을 안타까워해주고 “돈 벌어서 세탁기 사자”며 함께 버텨주는 가족이 있었다면 그 시간은 오히려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노동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을 위해 애써 희생했는데 그것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그는 더 슬펐던 것이 아닐까.

    큰아들의 젖먹이 시절, 새벽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한참을 달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는 훗날 이 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모습을 녹화해 나중에 보여준다 해도 우리 둘에게 같은 의미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새벽, 내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체온과 나를 짓누르던 절망 같은 피곤함은 결국 내가 선택한 의미로만 남는다. 따스한 기억으로든, 죽음 같은 피곤함이든.

    아이는 이제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청소년이 되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서 그 새벽이 의미 없진 않다. AI가 나보다 빨리 결과를 내놓는다 해도 나의 노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오늘의 삽질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향신문

    주한나 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데이터 과학자


    주한나 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데이터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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