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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6 (목)

    [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 식민지인 괴롭힌 영국의 입법 폭주, 독립전쟁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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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 자유를 향한 투쟁이 시작되다

    차세법·숙영법 강행에 자치권 박탈

    모욕감과 분노… 1차 대륙회의 소집

    법안 철회 요구하며 무장투쟁 준비

    1775년 英군대와 식민지 民兵 충돌

    미국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의 영토는 약 11배 확대됐고 인구는 135배 폭증했다. 세계 제1 경제력을 갖춘 건 100년 전이다.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세운 식민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기적을 이뤘을까? 미국과 세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선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 주

    조선일보

    1775년 4월 매사추세츠 콩코드로 식민지 민병대의 군수 물자를 압수하러 가던 영국 정규군이 렉싱턴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첫 전투를 벌였다. 곧 인근 콩코드에서도 무력 충돌이 일어나며 양측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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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전쟁(1756~63년)에서 승리한 영국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 세금 폭탄은 결국 식민지를 분노로 몰아넣었다. 그 끝은 독립으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국 지도부는 무지했을 뿐 아니라 무모했다. 하지만 그들의 만행에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개 식민지는 서로 남남이었다. 자연환경부터 사회적 성격, 역사적 발전 과정, 이해관계까지 모든 것이 달라 그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영국이 모국(母國)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분열된 식민지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세계 최강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 지도부는 결정적인 요인을 간과했다. 바로 리더의 수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력은 지리, 경제, 군사, 기술, 인구 등 객관적 지표로만 평가될 수 없다. 뛰어난 리더가 있으면 국력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 당시 식민지에는 탁월한 리더들이 숨겨져 있었다. 역사상 이토록 뛰어난 지도자들이 동시대에 다수 출현한 사례는 드물다. 반면 영국은 사정이 달랐다. 유능한 인재들이 배제되고 무능한 인물들이 전면에 나왔기에, 이 격차는 더 뚜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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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3년 12월 미국 보스턴 항구에서 영국의 차세법(Tea Act)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이 영국 동인도회사가 들여온 차를 바다에 버린 '보스턴 티파티' 사건 /미국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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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차를 바다에 버리다

    영국과 신대륙 식민지의 관계가 파탄 직전에 이른 것도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비루한 리더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충성스러웠던 식민지를 자의적인 세금 폭탄 세례로 단기간에 반란 직전으로 몰아넣고도 이유를 몰랐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동인도 회사의 차를 가득 실은 배들이 대서양을 건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턱이 없었다.

    식민지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식민지인들은 1773년 영국의 차세법(Tea Act)을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음모로 여겼다. 동인도 회사의 차에 대한 대대적 불매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차 수입상들은 ‘매국노’로 낙인찍혔다. 항구 노동자들은 차 하역 작업을 거부했다. 인지세법 파동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를 싣고 왔지만 배에서 내릴 수도, 판매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차는 영국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보스턴의 급진강경파 새뮤얼 애덤스(1722~1803)는 행동할 때라고 판단했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인디언 복장을 한 50여 명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인 다트머스 호 등 세 척의 배에 올라 실려 있던 동인도회사의 차를 바다에 던졌다. ‘보스턴 티파티’로 불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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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4년 가을 영국의 강압적 식민 통치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 12곳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벌인 1차 대륙회의 장면을 묘사한 벽화. 이로부터 15년 뒤(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은 이 회의에 버지니아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미국 국회의사당 관리처(A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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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모욕과 1차 대륙회의

    보스턴 티파티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도 분노로 들끓었다. 조지 3세(재위 1760~1820)는 식민지군 총사령관 게이지 장군에게 무력 사용을 명령했다. 의회는 이듬해 봄,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정부의 행정권과 재판권을 축소하는 등 강력한 법을 연이어 통과시켰다. 보스턴을 본보기로 정조준한 것이다. 숙영법도 개정해 식민지 주둔 영국군의 숙영 범위를 민가로 확대했다. 혈기왕성한 군인들에게 부인과 딸들이 있는 집에 언제든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이 법안들은 식민지인들에게 위협을 넘어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윌리엄 피트의 반대 목소리는 상·하원의 갈채에 간단히 묻혀버렸다. 식민지에서 보기엔 적반하장이었다. 식민지인들은 이 일련의 압제적인 법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 이름 붙였다. 왕실이 임명한 주지사에 의해 해산된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가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해산 명령에 따르기는커녕 ‘참을 수 없는 법’이 보스턴뿐 아니라 모든 식민지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규정하고, 대륙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1774년 가을,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단이 필라델피아로 모여 9월 5일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매사추세츠 대표는 존 애덤스와 새뮤얼 애덤스, 토머스 쿠싱 등이었다. 뉴욕은 존 제이와 제임스 두에인을, 펜실베이니아는 존 디킨스와 조지프 갤로웨이를, 델라웨어는 시저 로드니를, 코네티컷은 사일러스 딘을 대표로 각각 파견했다. 버지니아 대표는 리처드 헨리 리, 페이턴 랜돌프, 패트릭 헨리였다. 이들 모두는 훗날 한 국가를 이끌 충분한 자격과 역량을 갖춘 탁월한 정치인들이었다. 가장 빛나는 존재는 버지니아의 조지 워싱턴(1732~9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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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화가 돈 트로이아니가 렉싱턴 전투 장면을 그린 역사화 '자리를 지켜라(Stand your ground)'. 식민지 민병대(앞줄 사람들)가 붉은 옷을 입은 영국군과 대치하고 있다. 이 때 민병대 측의 존 파커 대위가 영국군이 먼저 발포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주방위국(N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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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 울려 퍼진 총성

    식민지를 대표하는 최초의 주권 기관에 해당하는 대륙회의는 1763년 이후 제정된 영국의 강압적인 법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다만 그 표현은 비교적 온건했다. 타협의 여지를 열어둔 조치였다. 대륙회의는 보스턴에 주둔 중인 영국군의 무력 행사에 대비해 군사적 준비를 하는 동시에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위해 대륙협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영국을 향해 단호하게 식민지 의견을 전달하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1차 대륙회의는 이듬해 봄 재소집을 약속하고 10월 26일 해산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빗발친 끝에야 영국 정부와 의회는 유화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774년 말부터 1775년 초까지 논의를 거듭했다. 드디어 영국 정부·의회는 식민지가 스스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처음부터 식민지가 요구한 것으로, 정치적 타이밍이 크게 늦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 제안이 식민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달이 났다. 보스턴의 게이지 장군이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인 새뮤얼 애덤스 등을 체포하고 민병대의 무기를 압수하기 위해 보스턴 인근의 렉싱턴과 콩코드로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영국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은 폴 리비어(1735~1818)가 민병대에 먼저 전했다. 1775년 4월 두 부대는 렉싱턴에서 충돌했다. 장차 세계를 뒤흔들 첫 총성이 어디서 발포됐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다. 렉싱턴에서는 영국 정규군이, 콩코드에서는 식민지 민병대가 승리했다. 영국군 사상자는 300명에 육박했고, 민병대의 희생은 100명 미만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은 예고된 운명처럼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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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토머스 페인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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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의 원인은 군주제 자체”

    독립 정신 일깨운 페인의 책 ‘상식’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울려 퍼진 총성보다 식민지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변화시킨 건 한 권의 책이었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 인간의 인식은 한번 각인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왕정(王政)이 전부인 시대에 태어나 평생 왕을 섬기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영국에 대한 저항은 곧 반역이었다. 대륙회의를 비롯한 식민지 대표 기관들이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영국 정부와 의회에 대화와 타협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페인은 영국 퀘이커 교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삶에서 여러 실패를 겪으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 대리인으로 와 있던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그에게서 글 쓰는 재능을 발견하고 지원했다. 1774년 11월 아메리카에 도착한 페인은 현지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1776년 마침내 ‘상식’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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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페인이 1776년 펴낸 책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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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은 군주제와 국왕, 영국과 식민지 관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다. 군주제는 오래된 독재의 산물이고, 왕위 세습은 자연의 이치에 반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갈등의 진짜 원인은 비양심적인 내각이 아니라 국왕의 존재 자체였다. 식민지인에겐 독립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페인은 주장했다. 이 책은 몇 달 만에 10만 부가 팔렸고, 독립은 모든 논쟁의 중심이 됐다. 식민지인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독립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송동훈 문명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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