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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자백

'두 얼굴의 이춘재', 처제 살해 다음 날 장인 찾아가 “도울 일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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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청주 처제 살인사건’ 판결문·경찰 수사 분석
이웃들은 "착한 애"…집안에선 돌변해 ‘재떨이 던지고 마구 폭행’
처제 살해 다음 날 장인 찾아가 "도울 것 없냐" 뻔뻔
전문가 "연쇄 살인 위해 이중적 모습 보였을 것"

조선일보

고등학교 시절 이춘재(왼쪽), 1988년 화성 연쇄 살인 7차 사건 당시 몽타주. /조선DB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춘재(56)는 부모도 못 말리는 불같은 성격으로 집안에선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까지 했지만 이춘재를 수십 년간 지켜본 이웃들은 "착한 애였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1994년 ‘청주 처제 성폭행·살인 사건’ 당시 이춘재를 수사했던 김시근(62) 전 형사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편이었다"며 "처제를 죽인 다음 날 장인 집에 찾아가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을 만큼 뻔뻔했다"고 말했다.

이춘재의 이런 모습을 두고 전문가들은 "연쇄 살인을 했다면 이춘재의 철저한 이중성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춘재가 일종의 ‘가면’을 쓴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춘재는 청주 사건 당시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항소 이유 등에서 "피해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뒤 그 사체를 유기한 사실이 없다"이라고 주장했다. 이춘재는 용의자로 특정된 이후 수차례 경찰 조사에서 "나는 화성 사건과 무관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화성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이춘재의 ‘자백’이 중요한 상황에서, 그에게서 정확한 답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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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이춘재에게 사형을 선고한 청주지방법원 1심 판결문.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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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와 ‘아주 원만한 관계’"…법원 "한 번 화 나면 부모도 못 말리는 성격"
24일 이춘재의 1심·2심 판결문 등에 따르면 이춘재는 아내와 1992년 4월에 결혼했다. 10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1991년 4월)이 발생한 지 1년 뒤다. 포크레인 기사였던 그는 골재 채취 회사에서 일하던 아내를 만났다. 이후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마땅한 생업을 잃자,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며 생계를 책임졌다.

경찰과 2심 판결문 등에 따르면 이춘재는 처가와는 ‘원만한 관계였다’고 한다. 고향인 경기 화성군(현 화성시)에서도 농사를 짓던 아버지를 도운 이춘재는 청주에서 벼농사를 하던 처가에도 자주 찾아가 일손을 거들었다고 한다. 김시근 전 형사는 "청주에 이춘재가 마땅한 연고가 없으니까 버스를 타고 장인어른 댁을 자주 갔다고 했다"며 "가서 벼도 베어주고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 안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는 물론 두살배기 아들도 감금하고 폭행했다. 법원은 이춘재가 "내성적이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부모도 말리지 못할 정도의 성격의 소유자"라고 봤다. 아들을 방안에 가두고 마구 때려 멍들게 하고,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무차별 폭행하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아내는 1993년 12월 집을 떠났다. 그는 가출한 아내에게 전화로 "내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것을 알아두라"고 협박했다. 또 동서에게 "아내와 이혼은 하겠지만 쉽게 이혼하지 않겠다. 다른 남자와 다시는 결혼하지 못하도록 문신을 새기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춘재와 처가의 관계는 이어졌다. 처제들이 반찬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춘재의 집에 자주 들렀고, 이춘재도 장모의 제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다고 한다. 이춘재의 ‘가면’은 그만큼 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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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충북 청주 처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이춘재가 구속되기 전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모습. /KB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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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범죄’ 꿈꿨던 이춘재, 처제 살해 다음 날 직접 실종 신고까지 해
피해자인 처제(당시 21세) 역시 평소 이춘재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1994년 1월 13일 오후 이춘재는 "토스트기를 가져가라"며 처제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이날 이춘재는 처제에게 수면제 탄 음료를 미리 준비해 마시게 했다. 하지만 처제가 수면제 효과가 들기 전 "친구와 교회를 가기로 약속했다"며 떠나려하자 성폭행했다. 이후 둔기로 내려쳐 살해한 뒤 시신을 검은 비닐봉지와 처제의 옷, 처제와 아내의 스타킹 등으로 싸매고 묶어 유기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춘재는 범행을 저지르고 밤을 새워 집에 있던 증거물을 치웠다. 당시 현장을 감식했던 경찰 관계자는 "가까스로 화장실 문고리와 세탁기 밑 장판에서 검출한 피해자 혈흔이 아니었다면 이춘재의 혐의를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완전 범죄’를 노렸다는 것이다.

이춘재는 범행 다음 날 처가로 향했다. 김시근 전 형사는 "장인어른을 찾아간 이춘재가 ‘도와드릴 일 없느냐’고 한 것으로 안다"며 "딸을 죽여놓고 아버지한테 그렇게 굴 만큼 이춘재는 뻔뻔한 인간이었다"고 말했다. 또 김 전 형사는 "처가에서 딸이 퇴근 후 돌아오지 않으니까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는데, 이때 이춘재도 함께 갔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항소와 상고를 거듭한 이춘재는 법정에서도 끝까지 처제 성폭행·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수사 기관에선 일부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지만 계속 진술을 번복했다. 그는 범행 하루 전인 1994년 1월 12일 오후 ‘집에 다녀가라’며 처제에게 전화한 사실이 통화 기록과 주변 증언 등을 통해 인정됐지만 경찰 조사에선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다. 이춘재는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했다가 검찰에선"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진술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다시 검찰에서 혐의를 인정한 이춘재는 법원에 가서는 "경찰관들이 고문하고 잠을 재우지 않아 견딜 수 없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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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가 나고 자랐던 옛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일대에 있는 어느 폐가의 모습. 바로 옆으로 새로 지어진 빌라 건물이 보인다. /화성=박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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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할머니들 "춘재는 착했다"…전문가 "연쇄 범죄, 이중성 없인 불가능"
이중성은 이춘재가 1963년~1993년까지 살았던 화성의 이웃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춘재는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현 화성시 진안동)에서 30년가량을 살았다. 이곳에서 그를 기억하는 토박이 노인 5명은 모두 어린 시절의 이춘재에 대해 ‘착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웃 김모(85) 할머니는 "춘재가 마음도 좋고 성품이 착해. 뭐든지 ‘네네’하고 잘 대답하는 아이였어"라고 했다. 그의 옆집에서 살았다는 한 할머니(94)는 "그 애가 그럴 애가 아니다. 그 사건을 춘재가 그랬다고 하는 건 너무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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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9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 화성군 태안읍 사건 현장부근에서 탐문수사 중인 경찰의 모습. /조선DB


범죄 심리학자들은 이춘재가 화성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다면 이런 ‘가면’을 쓰는 능력이 연쇄 살인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25년동안 교도소에서 1급 모범수로 살았을 만큼, 이춘재는 남을 일상적으로 속이고 감추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서 "과거 처제 살인 사건부터 철저히 이중성을 바탕으로 혐의를 부인해온 인물이어서 새로운 증거 확보가 어려운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쉽게 혐의를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 역시 "아내와 자녀 등 가정 내에선 폭력으로 강압하고, 외부적으로는 지극히 좋은 사람으로 비춰 자기편을 만들었을 것"이라며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는 능력이 연쇄 범죄를 저지르기 용이하게 만들었을 것"라고 했다.

[박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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