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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살얼음판 'n번방'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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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그놈'이 나타났다. 무성한 소문과 철저한 은닉술에 점점 실체가 부풀려지던 'n번방'의 수장, '박사' 조주빈이 스스로를 "악마"라 칭하며 포토라인에 섰다. 그리고 그날은 방송 제작진에게도 긴 하루의 시작이 됐다.

'박사' 조주빈 사건은 검거 소식부터 제작진에겐 큰 숙제를 안겼다. 먼저 그가 소셜미디어에서 사람을 모아 저질렀다는 범죄 혐의는, 모르는 사람에겐 현실감 제로(0)인 '남의 일'이고, 아는 사람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성범죄'였다. 이 두 얼굴을 가진 용의자를 어떻게 시청자에게 설명할지부터가 큰 걱정이었다. 성범죄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심의 기준을 위반하는 용어가 난무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피해자 중엔 다수의 미성년자가 포함돼 있어, 2차 피해를 막으면서도 해악은 알릴 지혜가 필요했다. 제작진은 방송 원고를 몇 번씩 곱씹어 살펴보며 표현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화면 처리도 큰 고민이었다. 일단 '박사'가 유포했다는 영상은 단 한 컷도 쓸 수 없었다. 자료 화면도 어설픈 모자이크가 오히려 상상력을 부추길 우려가 있어 사용하지 못한다. 결국 쓸 수 있는 영상이라곤 어두컴컴한 방에서 키보드를 치는 재연 화면밖엔 없었다. 이때 조주빈의 신상 공개가 결정됐다. 그림 걱정에 고민이 깊던 제작진엔 반전의 순간이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용의자 얼굴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가진 것이다.

조선일보

그런데 또 한 번의 반전이 제작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토라인에 선 조주빈이 느닷없이 유명인사 3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마저도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지?" 어리둥절했을 만큼 돌발 상황이었다. 다시 제작진은 혼돈에 빠졌고, 경찰 출입기자들도 긴급 취재에 들어갔다. 결국 경찰이 "조주빈이 세 사람에게 사기 쳤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제작진에겐 또 한 번 사기 피해자들의 해명을 방송에 반영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어둠 뒤에 숨어 있던 자칭 '악마'의 등장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를 보낸 제작진…. 앞으로 또 얼굴을 바꿔 등장할 이런 신종 범죄를 어떤 방식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 하루였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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