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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 이렇게 5년만에 슬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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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역 인근 1650평 국유지, 시민단체에 무상 임대했는데

퇴거 거부하며 "시민에 돌려줘라" 5년간 불법 건축물 20여동 들어서

주민들 "밤마다 노래 틀고 음주… 시민들 못쓰게 막는게 정작 누군가"

조선일보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5·6호선 공덕역 인근 공터에 컨테이너와 천막 등 20여동이 세워져 있다. /박상훈 기자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경의선 숲길로 향하는 중간에 약 1650평(5470㎡) 규모 공터가 나왔다. 공터 여기저기엔 컨테이너 등 불법 건축물 20여 동이 자리 잡았고, 바닥엔 부서진 목재와 침대 매트리스, 가스버너와 냄비가 굴러다녔다. 이런 상태가 벌써 5년째. 서울 시민의 인기 쉼터인 경의선 숲길 공원과 신축 아파트들로 둘러싸인 이 금싸라기 땅의 주인은 누구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공터 한쪽 '국유지에 상업 시설이 웬 말이냐. 개발을 중단하라. 시민 품으로!'란 글귀로 미뤄, 이 땅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2012년 12월 경의선 철길 마포 구간이 지하화되면서 상부에 공터가 만들어졌다. 공터의 주인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이렇게 생긴 부지 일부는 경의선 숲길 공원으로, 일부는 호텔·상업 시설들이 들어서는 복합역사로 개발하기로 했다.

문제의 공터는 원래 복합역사가 들어설 공간이었다. 땅을 개발하려면 각종 인·허가 기간이 필요하다. 마포구청이 "우범지대화 우려가 있으니 삽을 뜨기 전까지는 공터를 시민 장터로 쓰자"고 했고, 공단이 이를 받아들였다. 장터 운영 주체로 2015년 '늘장협동조합'이 뽑혔다. 사태의 시작이었다.

늘장협동조합의 무상 사용 허가 기한은 '2015년 말'이었다. 임대 종료 기한이 왔을 때, 돌연 이 단체들이 퇴거를 거부했다. 도리어 이들은 구에 "사회적 경제에 대한 몰이해와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해 온 구청의 처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후 다른 시민단체를 규합해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을 꾸렸고, "국유지는 상업 개발이 아닌 시민들의 공간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시민의 공간'이 선포되자 어디선가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포장마차였다. 2016년 아현동 포장마차골목이 철거되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다음엔 집 없는 사람들이었다. "2015년 성동구 행당동 재개발 과정에서 살 집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청년이 어디선가 컨테이너 박스를 들여놓더니 살기 시작했다.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가게를 잃었다"는 사람도 왔다. 지난해에는 운동권 교수단체인 '민교협'이 이곳에 '연구자의 집'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이렇게 생겨난 불법 건물이 지금은 20여곳. 10일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컨테이너 건물 내부엔 각종 집기가 정리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다.

이런 상태가 5년째 이어지자 지역 주민들은 "이 공간을 시민 품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는 곳이 도대체 누구냐"고 반문했다. 주민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공사 자재가 널려 있어 밤에는 절대 그 길을 못 지나간다" "밤이면 노래 틀고 술 마시는 통에 시끄러워 죽겠다" "시민들이 못 쓰게 막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는 글이 주기적으로 올라온다.

마포구청 관계자는 "지난달 말에도 DJ 공연이 벌어져 주민 민원이 빗발쳤다"고 했다. 마포구 주민 이영민(30)씨는 "시민을 위한 공간이라면서 어느 순간 우리가 아닌 '그들만의 공간'이 돼 버렸다"며 "주민들은 더 이상 저 공간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철도시설공단은 "철도 지하화로 거둬들이는 수익은 100% 철도에 재투자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고 있고, 경의선 지하화로 생긴 부지 절반 이상은 '경의선 숲길'이란 형태로 시민들에게 돌려 드렸다"며 "지하화 사업 자체를 악(惡)으로 치부하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이렇게 되고 보니 애초 공익 목적으로 무상으로 사용 허가를 내준 게 후회될 정도"라고 말했다.

공터를 점유한 단체 측은 "3월 31일까지 자진 철거하겠다"고 지난 2월 약속했다. 하지만 아직 20여 불법 시설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포구청은 "이달 말까지 철거하지 않는다면 강제 철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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