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엔 두 개의 정부… 트럼프 정부, 전통의 美 행정부
이를 이해 못 해 잠정 타결 소동… 코로나 이후 협상도 검토할 만
강인선 부국장 |
트럼프 시대의 워싱턴엔 두 개의 정부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핵심 참모들로 이뤄진 '트럼프 정부'가 있고, 기존 관료들로 이뤄진 전통적인 '미 행정부'가 있다. 폼페이오 국무, 에스퍼 국방장관처럼 트럼프의 뜻을 토 달지 않고 그대로 수행하려는 팀이 있고, 그 밑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부 기능이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 정부의 이런 이중적인 작동 기제를 감안하지 않으면, 최근 청와대 고위 당국자가 흘린 것으로 알려진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잠정 타결설 같은 어설픈 대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긍정적인 기대를 가질 만한 근거는 있었을 것이다. 많은 미 행정부 관계자들이 사석에서 트럼프의 40억달러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는 과도하다고 말한다. 미 협상팀도 10% 안팎의 인상률을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공감대를 '잠정 타결'로 언급했다면 트럼프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는 얘기다. 아니라면 총선 분위기 띄우기용이었을 것이다.
지소미아(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인한 한·미 갈등도 두 겹의 트럼프 정부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가 지소미아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고 보고 파기를 밀어붙였지만 미 행정부 관료와 외교관들의 끈질긴 압박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의 무관심 지대라 해도 관료들은 그대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도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정부 사정에 둔했기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는 대선 때 반(反)트럼프 세력의 주축이었던 외교관 그룹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믿으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리스 대사는 '트럼프 정부'와의 소통에 중요한 외교 자원이었다. 그런데도 시위대의 미 대사관저 침입을 나 몰라라 하고 인신공격을 해서 한국을 뜨고 싶게 만든 것은 유용한 소통 창구 하나를 닫아버린 꼴이었다.
안 그래도 소통이 어려웠던 한·미 관계에 코로나 위기와 미국 대선이라는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간 트럼프의 지지율을 떠받치던 미국 경제가 코로나로 곤두박질친 상황에서 트럼프가 재선으로 가는 길은 점점 험해지고 있다. 한때 역사상 최고치라며 자랑했던 다우지수나 고용률도 코로나 앞에 다 날아가버려 트럼프의 업적 리스트도 대폭 줄었다. 어쩌면 방위비 분담금 협상 결과가 대선 때까지 트럼프 손에 남은 몇 안 되는 카드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을 더 가혹하게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는 우리가 선진적이라고 믿던 시스템을 재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던진다. 속수무책으로 퍼지는 코로나 앞에 트럼프가 한국의 대응 경험을 듣고 싶어 했던 것 자체가 트럼프형 신고립주의 '아메리카 퍼스트'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이다. 코로나는 일단 국경을 닫아야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제공조 없이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코로나 덕에 그동안 대단찮게 생각했던 동맹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트럼프의 '50억달러 프레임' 안에 매몰돼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미 모두 코로나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트럼프가 재선되든 그렇지 않든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위비 분담금을 낮은 인상률로 3~5년 묶어두겠다는 발상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생각하면 의미 없는 구속일 수 있다. 주한미군 한국인 직원들은 이달부터 무급휴직 상태이고, 미국 대선까지는 6개월여가 남았다. 한·미 양국 모두 시간이 많지 않다. 차라리 단기 해결책을 찾고, 코로나 이후의 변화를 감안해 다시 협상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강인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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