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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존 볼턴 회고록 파장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보좌관인지 잊은 ‘강경매파’ 존 볼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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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고용주’에게 해고당한 ‘별난 직원’ 볼턴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보좌관인지 착각


한겨레

2019년 5월13일 존 볼턴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듣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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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몸통이 되려다 벌어진 일들. 아니, 깃털이 몸통 행세를 하려다 불거진 파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펴낸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났던 방: 백악관 회고록> 파장의 본질이다. 워싱턴을 드나드는 수많은 외교안보 전문가 중의 하나일뿐인 존 볼턴이라는 사람이 미국 대외정책에 관련한 불변의 진리를 대표한다고 행세하다가, ‘고용주’인 대통령에게 퇴짜를 맞은 사건이다. 워싱턴에서 ‘고용주’인 대통령이 ‘직원’인 각료나 보좌관들을 해고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이번 사태의 비극은 볼턴이라는 직원과 트럼프라는 고용주 모두가 아주 유별난 캐릭터여서, 결과적으로는 만나서는 안 될 조합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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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이중적 행태…베트남전 지지하며 참전 고의 회피


볼턴은 1948년 볼티모어의 소방수였던 아버지와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성장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으나, 백인 중하류층의 보수성향이 압도적이었다. 고교생이었던 1964년 미국 신보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배리 골드워터의 대선에 선거운동원으로 참여했다.

예일대와 그 로스쿨을 다닌 볼턴은 재학중 절정에 오른 베트남전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베트남전의 지지자였지만, 베트남전에는 참전하지 않으려고 병역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볼턴은 현역 징집대상이 되자, 주방위군에 입대했다. 자신에 대한 징집 효력이 만료될 때까지 4년이나 주방위군으로 근무했다.

훗날 예일대 졸업 25주년 재상봉 행사 기념 서적에서 그는 “동남아시아의 논에서 죽고 싶지 않았음을 고백한다”며 자신이 베트남전 참전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음을 인정했다. “베트남전은 이미 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 회피가 문제가 되자, 2007년에 한 인터뷰에서 “1970년에 내가 졸업할 때쯤, 베트남전 반대자들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는 점이 나에게 명백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베트남전 참전 기피를 반전론자 책임으로 돌렸다. 그는 2007년 펴낸 자서전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에서도 “의회의 반전세력들이 적에게 돌려줄 영토를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나에게는 터무니없이 보였다”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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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볼턴을 기용하고 자른 내막


회고록에는 우리가 살펴봐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트럼프가 왜 볼턴이라는 워싱턴의 강경매파 비주류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기용했는지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층에 어필할 대외정책의 총대를 메는데 볼턴이 필요했고, 이용했다.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이란과의 핵협정 파기, 동맹국들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 러시아와의 중거리핵협정 연장 포기를 통한 핵무기 증강 등이다. 워싱턴에서 볼턴은 이 사안들을 가장 강력히 주장하던 인사였고, 트럼프는 자신의 의제를 관철하는데 볼턴을 이용했다.

둘째, 트럼프가 어떻게 볼턴과 척을 지고는 그를 잘라버리게 됐느냐는 것이다. 결정적인 대목이 북-미 협상이다.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박과 제재를 가해서 ‘리비아식 핵포기’를 주장하던 볼턴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협상하려던 트럼프에게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다른 대외정책 사안과는 달리 북-미 협상에서 트럼프는 국가안보보좌관인 볼턴에게 협조를 받기는커녕 발목을 붙들렸고, 이는 결국 북-미 협상이 좌초되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북-미 협상 좌초와 관련해 볼턴은 트럼프의 즉흥성을 김정은이 이용한 결과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드러내는 사안이다. 트럼프는 기존 동맹국과의 관계 강화보다는 적성국와의 타협을 통해 미국의 역할과 부담을 줄이는 대외정책 철학을 지니고 있고, 북-미 협상을 통해 그 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런 철학을 관철하는데 즉흥적이고, 자신의 정치적 동기에 이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반면, 볼턴은 동맹국들을 종속시키고 적성국들을 최대한 압박해야 한다는 미국 중심주의 세계관의 끝판왕적인 견해를 대표한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중심주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는 다른 나라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책임회피를 통한 이기주의’고, 볼턴의 미국 중심주의는 다른 나라에 대한 ‘끝없는 힘의 과시를 통한 팽창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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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났던 방: 백악관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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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워싱턴 주류 협조 실패하자 볼턴으로 선회


회고록은 트럼프 행정부 초기 트럼프를 견제하고 행정부의 중심을 잡았다는 이른바 ‘어른들의 축’(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라인스 프리버스 및 존 켈리 전 백악관 비서실장,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 등 국정 경험이 있던 보수적 주류 인사들)에 대한 평가로 시작한다.

“트럼프의 궤적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잘못됐다. 지적인 게으름뱅이들에게 매력적인 이 ‘수용된 진실’은 트럼프는 언제나 기이하나, 그의 첫 15개월 동안은 자신의 새로운 장소가 낯설어서 ‘어른들의 축’에 의해 견제되어 행동하기를 주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트럼프가 스스로에 대해 더 자신하게 되면서, ‘어른들의 축’은 떠나고, 일들은 산산조각나고, 트럼프는 ‘예스맨’들에 의해 둘러쌓였다. 이 가설의 조각들은 사실이나, 전반적인 그림은 단순하다. 어른들의 축은 많은 점에서 지속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들이 트럼프를 성공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 그들이 정확히 그 반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질서를 세우지 못했고, 그들이 했던 일들은 명백히 자신들을 위한 것이고 트럼프의 매우 명백한 목적들을 공개적으로 일축해서 이미 의심에 가득찬 트럼프의 마음 상태를 부추켰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통령과의 정당한 정책을 교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운을 떼며 회고록을 시작한 볼턴은 트럼프 행정부의 조각 등 초기부터 자신이 국무장관, 그리고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유력하게 물망에 올랐으나, 이들 어른들의 축에 속하는 이들에 의해 좌초됐다는 주장과 사연을 전한다. 볼턴은 애초에 초대 국무장관으로 자신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틸러슨에게 밀린 사연을 이렇게 전한다.

“트럼프는 12월1일 제임스 매티스를 국방장관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국무장관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계속됐다. 다음날 나는 트럼프타워에 도착해 로비에서 그를 기다렸다. 대통령 당선자는 스케줄이 늘어지는 것이 전형적이었는데,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나중에 나는 게이츠가 렉스 틸러슨을 에너지 장관이나 국무장관으로 로비하려고 거기에 왔다고 추측하게 됐다 (…) 나는 마침내 트럼프의 사무실에 들어가 1시간 이상이나 만났고, 라인스 프리버스(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와 스티브 배넌(전략고문 내정자)도 동석했다 (…) 내가 국무부가 효과적인 정책수단이 되려면 문화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트럼프는 ‘자 이제 우리가 이 지점에서 국무장관을 토론하는 거지, 그런데 당신은 부장관에 관심이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그런 차원에서는 국무부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고 설명하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초대 국무장관으로 틸러슨을 지명했다. 이는 볼턴이 설명한대로 게이츠의 추천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게이츠는 워싱턴 외교안보 서클에서 가장 표준적인 주류 의견을 대표하는 인사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정부를 넘나들며 국방장관과 중앙정보국장을 거듭 지낸 인사다. 트럼프가 게이츠의 추천을 받아 틸러슨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그가 애초에는 워싱턴 외교안보 주류들의 지지와 협력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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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지난해 4월17일(현지시각) 플로리다주 코럴 게이블스에서 연설하는 모습. 볼턴 보좌관은 이날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미국이 3차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으로부터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을 했다”는 진정한 징후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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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볼턴, 북한 놓고 애초부터 동상이몽


트럼프에게 볼턴은 처음부터 필요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틸러슨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고,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마이크 플린이 곧 낙마한 뒤에 볼턴은 트럼프 쪽으로부터 국무부 부장관이나 백악관 고문 등으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계속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볼턴은 트럼프나 백악관 참모들로부터 자문을 받고는 대외정책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른바 ‘어른들의 축’이 반대하던 의견들이었다.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이란과의 핵협정 파기 등을 트럼프에게 설명하고 제안해 트럼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전해들었거나, 트럼프로부터 직접 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들이다.

“나는 정말로 볼턴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주 훌륭해, 존은 마치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해, 계속 듣게 돼. 나는 아주 좋아.” “맞아, 꼭 나와 같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존과 나는 그 점에서 똑같아.”

볼턴에 대한 트럼프의 칭찬은 대외정책에서 주류적 의견을 대변하는 ‘어른들의 축’과의 이견이 깊어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이는 트럼프가 자신의 의제를 관철할 수단으로 볼턴이 필요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볼턴 역시 이를 알고는 있었다.

“나는 트럼프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그를 행정부로 데려와서, 텔레비전에서 우리를 옹호할 수 있게 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내가 의도하던 마지막 일이다.”

볼턴 역시 트럼프가 자신을 이용하려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국가안보보좌관 직을 열망하고 덥썩 물었다는 데에 파국의 근본적 원인이 있다. 특히, 이 파국을 몰고온 북한 문제는 그의 안보보좌관 직을 임명하는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드러났다. 2018년 3월21일 볼턴은 트럼프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백악관에서 아마 가장 강력한 자리를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볼턴은 트럼프를 만났다.

“우리는 또다른 인터뷰로 보이는 것을 시작했고, 이란과 북한에 대해 얘기했다 (…) 적어도 그는 이란과의 협정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가오는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안 했다. 내가 읽기가 어려운 생략이었다”

볼턴의 안보보좌관 직무는 이렇게 시작됐다. 시작부터 북한 문제를 폭탄으로 안고서 시작된 것이다. 북한 문제는 볼턴에게는 과거 워싱턴에서 자신의 경력을 가른 사안이었는데, 또다시 그런 폭탄이 될 거라고는 트럼프나 볼턴이나 예상 못 했다. 이를 알려면 시계를 17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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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 유엔대사 낙마한 북한과의 악연


2003년 8월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존 볼턴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을 “인간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볼턴의 북한 체제 비난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이 사건으로 볼턴은 워싱턴의 외교안보 주류 진영에서 ‘강경 매파’로 낙인찍히며, 몰락해갔다. 나중에 유엔 대사로 임명될 때에도 걸림돌로 작용하는 악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지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이던 볼턴은 그해 7월31일 서울을 방문해 동아시아연구원 주최 강연회에서 ‘기로에 선 독재정권’이라는 강연을 통해 북한 정권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김정일은 평양에서 왕족같은 삶을 살면서도, 수만명의 주민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수백만의 주민들은 비참한 가난에 처하게 했다”며 “북한의 많은 주민들에게 삶은 지옥같은 악몽”이라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북한이 6자회담 재개에 나설 준비가 됐다고 미 국무부가 발표한 날이었다. 국무부는 볼턴 차관이 새로운 사태 진전을 알지 못했다며 그와 거리두기를 했다.

이틀 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미 행정부의 관리라고 하는 자의 입에서 이런 망발이 거리낌 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미국이 우리와 회담을 하자는 진의 자체가 의심스러워진다”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문제가 결정되는 회담의 중요성으로 보나 인간존엄의 견지에서 볼 때도 이 회담에 인간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와 같은 자가 끼울 자리는 없다”고 6자회담에서 볼턴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부시 대통령은 볼턴을 옹호하고 그가 6자회담에서 배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9월 6자회담이 재개됐을 때, 그는 국무부 내에서 6자회담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

2005년 볼턴의 유엔 대사 인준 과정에서도 이 사건은 문제가 됐다. 볼턴은 상원 외교위에서 당시 자신의 연설은 국무부와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의 승인을 받았고, 허바드가 사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이에 허바드는 당시 자신은 볼턴에게 “표현을 약화”하라고 충고했고, 볼턴이 몇 가지 사실관계 수정을 한 것에 대해서만 고맙다고 말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볼턴은 결국 의회의 정식 인준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의회 휴회 기간 동안 대통령의 일방적 임명으로 부임했고, 2006년 의회의 정식 인준을 받지 못해 유엔대사를 그만둬야 했다. 그의 유엔대사 인준 불발은 공화당까지 가세한 결과였다.

유엔대사에서 물러난 뒤 그는 무책임한 강경발언만 쏟아내는 눈치없는 매파로 워싱턴에서 낙인찍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마지막 워싱턴 인사일 정도로 워싱턴에서 그의 지위는 비주류 강경매파에 불과했다. 워싱턴에서 이라크전이 정당하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것은 한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 특수군의 소행이라는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우파 방송인 <폭스뉴스>의 평론가로서 떠들었던 볼턴은 종편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 특수군 소행이라고 강변하는 극우인사와 같은 위상이었다.

그는 지난 2월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의 해빙 분위기가 조성된 뒤에도 북한을 비난하는 최선봉에 섰다. 지난 2월28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북한을 선제타격하는 합법적 경우’라는 기고를 통해 “북한의 핵무기가 조성하는 현재의 ‘불가피한 일’에 선제타격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국에서 완전히 합법적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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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31일 오후 방한중인 존 볼턴 당시 미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차관이 서울 남영동 미대사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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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은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보좌관인지’를 잊었다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되자 그는 “내가 그동안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던 것들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라며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하는 말과 내가 그에게 하는 조언”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역할은 “정직한 중개인”이라며 “대통령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대통령이 결정하면 참모들은 이를 실행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 조언하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회고록에서도 그는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 직을 수행한 딘 애치슨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는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국무장관인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트루먼 대통령) 역시 이것을 잊지 않았다”라는 애치슨의 말을 인용했다. 이 말을 자신이 국가안보보좌관이나 국무장관에 물망에 오를 때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트럼프와 볼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파국을 맞았다.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안보보좌관인지, 볼턴은 잊어버린 것이다. 회고록 <내 자신을 위해 말한다>(Speaking for myself)의 출간을 앞둔 세라 샌더스 전 백악관 대변인도 볼턴의 회고록이 문제가 되자 22일 자신의 회고록 중 일부를 공개해, 볼턴을 비난했다. 샌더스는 볼턴이 평소에도 대통령처럼 굴어서 주변에 인기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믹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 역시 볼턴에게 “현실을 제대로 알자, 너는 자기중심적인 개새끼”라고 소리쳤다고 샌더스는 공개했다.

워싱턴에서 비주류 강경매파에 불과하던 볼턴은 마치 자신만이 미국의 국익을 지킬 수 있고, 워싱턴의 주류처럼 행세하며 트럼프에 대들었다. 트럼프는 시간이 지나면서 용도폐기된 볼턴을 더이상 두고보지 않았다. 특히, 북한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트럼프는 볼턴이 이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파문을 일으키자, 볼턴은 “정신나간 사람”이며, “볼턴이 북한에 대해 리비아 모델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모든 게 망해버렸다”고 반격했다. 그 바람에 “잘 지내고 있던 김정은이 미사일처럼 분통을 터뜨렸다”고도 말했다. 트럼프는 볼턴의 형편없는 주장들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됐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했다.

분수를 알던 여느 꼬리와는 달리, 볼턴이라는 꼬리는 자아가 강하고 착각이 심했다. 트럼프라는 몸통은 그 꼬리가 몸통을 때리도록 허용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허술해서 통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회고록의 포인트는 자아와 착각에 입각한 볼턴의 꼬리치기를 트럼프라는 몸통이 처음에는 이용하다가, 결국은 넌더리를 내고는 잘라버리는 것이다. 볼턴은 이를 자신의 유능함과 진리를 트럼프라는 멍청이가 수용하지 못하는 과정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그래서, 볼턴의 회고록은 볼턴의 옳다고 주장하는 대외정책과 그 결정 과정이 아니라, 그가 설치도록 허용됐던 트럼프와 그 백악관의 난맥상을 읽는데 유용하다.

이는 워싱턴에서 대외정책의 중심과 좌표가 실종됐음을 드러내는 사태이기도 하다. 몸통에 트럼프가 등극하고, 꼬리에는 볼턴이 기용돼서, 최악의 조합을 연출한 자체가 그렇다. 회고록은 볼턴이 워싱턴의 주류적 견해를 대표하는데, 트럼프라는 이단아가 이를 소화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보다는 볼턴이라는 꼬리, 아니 색깔이 남다른 깃털이 몸통인양 행세하다가 벌어진 파국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또 볼턴이라는 깃털이 설칠 수 있었던 것은 트럼프라는 비정통적이고 이단아적인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트럼프 이후 망가져가는 미국의 모습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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