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대한민국
상속이란 무엇인가
6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갚아야 하는 부친의 빚이다. 조변현 전 웅동학원 이사장이 사망하자 유족은 법원에 그의 재산이 21원, 빚은 49억8700만원이라고 신고했다. 부채 대부분은 연대보증을 선 조 전 장관 모친과 동생이 넘겨받았다. 50억원대 자산가인 조 전 장관은 ‘한정승인(限定承認)’을 신청했다. 상속받은 재산 한도 안에서만 빚을 승계하면 된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6원을 갚으라고 통보하는 데 우표값이 더 나오기 때문에 집행을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건은 한국에서 상속(相續)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극과 극이다. 상속 분쟁은 더 이상 부자들의 고민이 아니다. 송재상 세무사는 “최근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서울과 수도권엔 10억원 넘는 아파트가 흔하다”며 “보유하는 동안에는 종부세를, 별세하면 상속세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속 개시(사망)가 당장 현실화하지 않아 그렇지 조만간 닥칠 일이라는 얘기다.
2020년 한국에서 상속이란 무엇인가 /일러스트=안병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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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 속담은 유통기한이 소멸하는 중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들도 갈라졌다. 어떤 혈육은 원수나 다름없다. 전국 가정법원에 접수되는 상속 분쟁이 증명한다. 상속 재산 분할청구는 2015년 1008건, 2017년 1403건, 2019년 1886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가 상속 재산을 놓고 다투고 의절하는 일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식이 끝나면 부의금을 나누다 법정까지 갈 정도다.
“자녀에게 재산을 다 주면 굶어 죽고, 한 푼도 안 주면 맞아 죽고, 절반만 주면 시달려 죽는다.”
‘상속·증여 설계’를 쓴 이병권 신구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이 말 속에 재산 이전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고충이 담겨 있다”며 “1970~80년대 고성장기를 거치며 부를 축적한 60~70대와 달리 자녀 세대는 경제적으로 불확실하고 독립 기반을 마련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상속에도 ‘순위’가 있다. 피상속인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을 상속권자라 한다. 민법상 상속 1순위자는 직계비속. 자기로부터 직계로 이어져 내려가는 혈족으로 자녀, 손주 등을 가리킨다. 피상속인에게 배우자가 있을 경우 배우자도 자녀와 함께 1순위자가 된다. 직계비속이 없다면 피상속인의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등)이 2순위자로 상속권을 갖는다. 이때에도 피상속인의 배우자는 직계존속과 동등한 상속권을 갖는다. 직계비속과 직계존속이 없을 경우는 배우자가 단독으로 상속권을 갖는다. 피상속인이 직계비속도, 직계존속도, 배우자도 없다면 상속권은 3순위자인 형제자매에게 돌아간다.
상속 증여세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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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류분 반환청구도 늘어
상속에는 ‘지정상속’과 ‘법정상속’이 있다. 지정상속은 유언장이나 사망 당시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나누는 것을 이른다. 민법이 정한 요건을 갖춰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런 유언 없이 사망한 경우에는 민법이 정한 비율대로 상속 재산을 나눠 갖게 된다. 이 법정상속 지분은 모든 상속인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되 배우자만 50% 할증한다. 예를 들어 상속인이 배우자와 3남매일 경우 배우자는 1.5의 지분을, 3남매는 각각 1의 지분을 갖게 된다. 즉 배우자는 1.5/4.5(약 33%), 3남매는 각각 1/4.5(약 22%)을 받는 셈이다.
소방관 딸이 순직하자 32년 만에 나타나 유족급여 등 8000만원을 챙긴 생모가 있었다. 전주지법은 지난 6월 이 여성에 대해 ‘두 딸을 홀로 키운 전 남편에게 양육비 7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부양 의무를 게을리한 부모에 대해 상속을 제한하는 민법 개정안(일명 ‘구하라법’)은 21대 국회에도 제출됐다.
우리나라는 지정상속에 의한 재산분배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피상속인의 뜻에 따른 유산분배 과정에서 일부 상속인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민법은 이 문제점을 유류분(遺留分) 청구제도로 보완한다. 직계비속과 배우자는 법정지분의 1/2,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법정지분의 1/3까지 상속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2010년 452건이던 유류분 반환청구소송은 지난해 1511건으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서울에는 똘똘한 아파트 한 채만 가지고 있어도 20억대 자산가가 되는 경우가 많고, 성평등 의식 개선으로 불공평한 재산 분배를 여성들이 두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어머니가 남긴 상속 재산 일부를 나눠달라며 동생들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청구소송을 낸 사실이 최근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 7월 숨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마지막으로 신고한 재산은 마이너스 6억9091만원이었다. 박 전 시장의 자녀들은 10월 6일 상속 포기를, 박 전 시장 아내는 이튿날 한정승인을 신청했다. 상속 포기는 재산과 빚을 모두 물려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한정승인은 재산 범위 안에서만 빚을 갚겠다는 뜻이다. 서울가정법원은 10월 30일 이 상속 포기와 한정승인을 모두 수용했다.
상속 포기만 할 경우 다음 순위 상속인에게 빚이 자동으로 넘어간다. 한정승인은 법원 심사를 거쳐 재산보다 빚이 많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선고가 내려진다. 1순위 상속권자인 자녀와 배우자가 상속 포기와 한정승인을 모두 신청했기 때문에, 한정승인이 수용되면 2순위 이하 상속인으로 가는 ‘빚 쓰나미’를 막을 수 있다. 상속 포기와 한정승인은 상속 개시를 안 날(통상 사망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
증여(사전 상속)가 뜬다
교양 월간지 ‘샘터’를 발행하는 출판사 샘터는 대학로의 명물이던 붉은 벽돌 사옥을 2017년 팔아야 했다. 창립자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별세하고 시작된 상속세 부담 때문이었다. 김성구 샘터 대표는 “가업인 출판을 지키려면 사옥을 처분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했다.
죽음과 세금(death and taxes)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상속세율은 최근 20년간 달라지지 않았다. 황혼 이혼과 재혼이 늘어난 시대에 슬기로운 상속의 기술은 뭘까.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제목에 ‘상속’이나 ‘증여’를 붙이고 나온 신간은 48종. 2016년 이후 출간 종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올 들어 10월까지 판매량도 전년 동기 대비 48%나 늘었다”고 했다.
상속인이 배우자와 자녀이고 상속 재산이 10억원이 안 될 경우에는 상속세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값 폭등으로 장차 상속세를 내야 할 사람은 가파르게 늘어날 전망이다. 증여는 ‘살아서 하는 상속’으로 최근 가장 널리 활용된다. 우영제 회계사는 “상속 전에 미리 증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10년에 한 번은 자녀에게 5000만원씩(미성년자는 최고 2000만원) 비과세로 증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자산 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보고 과표를 낮추기 위해 미리 증여하기도 하고 보유세·양도세 부담에 매각보다 증여를 선택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고령화나 치매와도 얽혀 있다. 조금이라도 쌀 때 증여하면 세금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현재 집값이 10억원이라면 10년 뒤에는 20억원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세청 ‘증여세 결정 현황’에 따르면 미성년자에게 증여된 총재산은 2016년 6848억원에서 2018년 1조2597억원으로 84.0% 급증했다. 특히 2018년 전체 서울 지역 미성년자 증여세 결정액 1886억원 중 절반이 넘는 1116억원은 강남 3구에서 나왔다.
‘못된 자식들은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고, 착하고 근면한 자식들은 상속이 필요 없다.' 중국 속담이다. 상속을 어떻게 설계할지, 자식을 믿을 수 있을지, 물려받자마자 날려버리진 않을지 부모는 불안하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생전에 신탁계약을 미리 준비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최재천 변호사는 “사후에 신탁이 정한 대로 유산의 20%는 자선재단에, 장례 관련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은 아내와 세 자녀에게 상속됐다”며 “자녀들은 스물이 돼서야 일부 상속을 받을 수 있었고 상속이 완결되는 시점은 그들이 마흔이 되는 생일날”이라고 했다.
영화 ‘영웅본색’의 ‘따거(大哥·맏형)’ 주윤발은 2018년 당시 재산 56억홍콩달러(약 8100억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아내가 있지만 친자식은 없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돈을 잠시 보관할 뿐이다. 내 꿈은 행복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재산 기부를 택한 영화배우 주윤발이 홍콩에서 전철을 타는 모습. |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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