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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베첼리오 티치아노의 '다이아나와 칼리스토'(1559).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시종 혹은 그리스 아르카디아의 왕 리카온의 딸로 알려져 있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제우스신에게 강간당해 임신한 칼리스토(왼쪽)를 아르테미스 여신(오른쪽)이 추방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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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두 번째 이야기다. 신화는 역사 이전의 집단 기억이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지역을 침략한 헬레네 민족이 여신을 숭배하던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남신 제우스 위주로 신화를 재편성한 역사를 반영한다. 그래서 최고신 제우스는 수많은 여신들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갖고 성폭력을 일삼고, 패배한 민족의 여신과 저항하는 여신들은 괴물이 되었다. 이는 여성들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이야기를 기록했느냐에 달린 문제다. 이상이 2주 전에 실린 글 내용이다.
제우스는 인간 여성과도 결합한다. 아내인 헤라의 눈을 피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운다. 말이 바람이지, 강간을 일삼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면 제우스는 백조나 소, 황금 비, 인간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욕심을 채우고 있다. 도대체 제우스는 왜 이럴까?
답은 제우스의 아들들이 영웅이 되는 신화 내용에 있다. 그리스 각 지역의 민족들, 도시국가 건국 시조의 후손들은 자기 민족이나 도시, 왕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우스를 끌어들인다. 제우스가 그리스 최고신이기에 시조로 삼기에 멋져 보일뿐더러 자신들의 지배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이 동맹을 맺어 공통의 적을 상대로 전쟁을 하다 보니, 그리스인의 단결을 위해 공통된 역사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에우로페의 강간'(1560-62). 소로 변한 제우스(오른쪽) 신에게 납치당하는 에우로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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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후손이되, 모계 지위도 필요했던 건국신화
에우로페 신화를 보자.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는 소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납치당해 크레타로 가게 된다. 에우로페가 낳은 제우스의 아들은 크레타 왕가의 조상이 된다. 한편 에우로페의 아버지는 딸을 찾아오라고 세 아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각각 테베, 페니키아, 킬리키아를 건설한다. 이렇게 각국의 지배자들은 제우스와 관련된 건국 신화를 만들어 자신들이 최고 신의 후손이거나 인척임을 자랑한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신들에게 복종하라고 민중을 세뇌한다.
제우스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인간 여성을 속여 접근하는 이유도 신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관련 있다. 제우스와의 성관계가 '화간'이면 안 된다. 속여서 하거나 강간이어야 왕비, 공주 신분인 모계 조상에게 도덕적 결함이 생기지 않는다. 최고신의 후손이고는 싶지만 바람피운 여자의 후손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해서 레다에게 접근한다. 레다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이후 레다가 낳은 아이들 중 한 명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결혼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헬레네와 같이 태어난 쌍둥이 언니다. 결국 제우스의 이번 바람 사건은 트로이 전쟁 발발과 미케네 왕조의 흥망과 관련 있다.
이렇듯 시기상 일찍 성립한 크레타와 미케네 왕실은 제우스의 후손이다. 보다 늦게 이주해서 스파르타를 세운 도리아인들은 제우스와 인간 여성 알크메네 사이에 태어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다. 후대에 성립한 왕실이거나, 왕실보다 격이 낮은 호족들은 제우스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로 가문의 시조를 삼는다.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러 곳곳을 다니며 그 지역 공주들과 열심히 동침한다. 태어난 아들은 각 지역 유력 가문의 시조가 된다.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괴물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적국이나 자연재해 등을 상징한다.
한편,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과 영웅들이 각지에서 여성을 납치하고 성관계하는 것은 실제 역사에서 전시 강간과 약탈을 의미한다. 약탈에는 물자만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도 포함된다. 산업혁명 이전은 토지와 인간의 노동력이 중요했다. 노예를 얻기 위한 인간 약탈은 전쟁의 한 목표이기도 했다. 약탈은 비도덕적이고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라 승자의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약탈과 강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쟁에 이겨서, 혹은 평상시에 무력으로 상대의 재산과 여성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라는 증거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일삼는 범죄자가 신의 사랑을 받는 영웅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스 신화가 당시 사회의 강력한 가부장제를 반영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는 또 고대 그리스 남성들 나아가 서구인들의 여성관에 영향을 주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 일행에게 성매매를 알선하고 클럽 버닝썬의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빅뱅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2019년 5월 14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후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해 초 성매매 알선 등 9개 혐의에 대해 불구속 기소됐고 군대에 입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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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 텔레그램 n번방으로 이어지는 '여성 사냥'
현재, 전쟁과 약탈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없다. 제우스를 신앙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런 남성 영웅의 이미지는 21세기에도 남아 있다. 여성 괴물을 처단하며, 강제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많은 여성과 성관계하는 것을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의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서 많은 남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버닝썬과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종종 보도되는 집단 성폭력 사건들이다. 버닝썬은 고객 남성을 귀하게 접대하기 위해 여성을 사냥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 사건이다. 약물로 정신을 잃은 여성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해도 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예는 많다. 어떤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나쁜 평판을 지어내어 소문낸다든지, 조건만남 사이트에 번호를 올려 버리는 경우를 보자. 이는 그 여성이 성폭력 당하기를 유도하는 행위다. 남성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한다고 좌표를 찍어 어떤 여성을 공격하게끔 하는 행위는 저항한 민족의 여신을 여성 괴물로 만들어 처단하는 패턴과 같다.
지난해 3월 25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25)이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n번방'의 운영자들은 미성년자 등 여성들에게 '신상정보를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이들의 나체 사진과 영상 등을 갈취하는 등 성착취와 성폭행까지 이어지는 범죄 행각을 보였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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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성욕 아니라 지배욕이다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여성을 위협하는 방법 중 하나가 성폭력인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말싸움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이런 나쁜 년! 너 박아버린다!”고 협박하던 남자애들이 있었다. 궁금하다. 그렇게나 천하의 쌍년이라면 왜 그런 협박을 할까? 싫은 사람과는 손끝만 스쳐도 소름끼치는데 성욕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이는 성폭력은 성욕이 아니라 지배욕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한편, 강간하겠다는 협박은 상대 여성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동성인 남성 집단의 인정을 얻으려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성을 같이 사냥하면서 남성들은 하나가 된다. 공동의 적이 있으면 그 집단은 하나로 뭉치게 되므로. 그러기에 성폭력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일부 남성들은 전체 남성 집단에 대한 도전이자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형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을 하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도 여성을 '페미니스트 괴물'로 공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으로 남성들은 남성 집단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저항하는 상대 여성을 괴물로 만든 후, 죽이거나 강간을 하겠다며 위협해 왔으며, 여성 괴물을 처단하는 남성을 무리의 영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자들에게 면벌부를 줄 생각은 없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범죄를 조장하고 피해 여성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21세기다.
박신영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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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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