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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오징어 게임' 전세계 돌풍

환호 쏟아졌지만…덤덤하게 무대 지킨 '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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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정신분석 박사 프로이트로 열연 중인 오영수 배우. [사진 제공 = 파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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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시간이 지연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100분의 공연이 막을 내리고 커튼콜이 시작됐다. 지친 기색도 없이 무대로 다시 나온 오영수 배우에게 330여 명의 관객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미국에서 건너온 수상 소식에 대한 환호도 아닌, 장인의 연기를 보여준 78세의 노 배우에게 보내는 뜨거운 환호였다. 노 배우는 아무 말 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후배 이상윤의 등만 두드려주고 뒤돌아보지 않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작은 몸집이었지만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어두워진 무대 위에는 박수소리만 남았다.

11일 오후 8시 연극 '라스트 세션'이 공연되는 대학로 TOM시어터 1관은 평소와는 다른 달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루 전인 10일 '오징어 게임'으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오영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대에 오르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은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특별한 날의 인증샷을 남기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 '월드 스타'가 된 '깐부 할아버지'의 티켓 파워는 대단했다. 기획사 파크컴퍼니에 따르면 수상 소식 이후에만 5000장이 넘게 티켓이 팔렸다. 예매사이트 인터파크에서 연극 부문 1위로 올라섰고, 1월까지 남은 오 배우의 공연 11회차는 전석 매진됐다. 아무런 대외 활동 없이 11일 오후 4시 공연장으로 평소처럼 출근한 오영수에게 후배들은 케이크와 분홍색 왕관을 준비해 깜짝파티를 열어줬다.

공연이 시작되자 만석인 객석에서도 느껴지는 흥분과 달리 노 배우에겐 긴장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기자회견도 거부하고 "무대로 돌아가겠다. 이 연극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한 그다웠다.

무대 위의 시간은 80여 년 전으로 돌아갔다. 아늑하게 꾸며진 프로이트의 서재가 유일한 무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1939년 9월 3일 오전, 런던으로 프로이트를 찾아온 이가 있다. 옥스퍼드대의 젊은 교수 겸 작가 C S 루이스(이상윤)가 저명한 정신분석 박사 프로이트(오영수)의 초대를 받고 찾아온다.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아맨드 M 니콜라이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이다. 각각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대표하며 사상적으로 충돌한 둘은 현실에선 만난 적이 없다. 작가의 상상을 통해 조우한 두 사람은 세계대전만큼이나 강렬한 충돌을 보여준다.

두 개의 전쟁이 교차했다. 루이스는 책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 탓에 초대됐다고 생각해 히틀러처럼 선전포고도 없이 프로이트를 기습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변증을 궁금해했다고 맞받아친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물과 얼음 같았다. 무신론자의 농담과 유신론자의 열정이 격돌했다. "당신은 미신을 믿고, 나는 과학을 믿는다"고 비난했지만 암으로 투병하는 프로이트도 죽음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개종한 루이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성경을 인용했지만 프로이트의 달변에 말문이 막혔다. 포성이 울리고 전쟁이 발발한 밤이지만, 두 사람의 논쟁은 종교와 인간, 학문과 사랑까지 다루며 뻗어나간다. 오영수의 프로이트는 노련함과 유머가 빛났다. 객석을 웃음으로 전염시키는 건 주로 오영수의 몫이었다. 중극장의 객석을 울리는 발성으로 루이스를 윽박지를 땐 "이러다가는 다 죽어"를 외치던 오일남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이상윤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하룻밤의 '마지막 논쟁'을 마치고 루이스는 서재를 떠나간다. "죽음도 삶만큼이나 불공평하구먼." 홀로 남은 프로이트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평소에 하던 농담처럼 세상을 떠난 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연극은 이토록 색다르게 박제했다.

'라스트 세션'의 프로이트 역은 신구, 루이스 역은 전박찬 배우가 함께 맡아서, 이날 두 배우와 번갈아 무대에 선다. 공연은 3월 6일까지.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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