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백악관 연설을 통해 러시아를 겨냥한 제재를 발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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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 독립 승인과 병력 진입 명령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제재에 나섰다. 서방은 러시아의 대응에 따라 보다 강도 높은 추가 제재를 내놓을 계획이다. 애초 예정됐던 미·러 외무장관 회담이 취소되는 등 외교적 협상 노력은 사실상 중단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백악관 연설에서 “이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의 시작”이라면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 당시) 우리와 동맹국이 취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제재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크렘린궁의 자금줄인 국책은행 VEB와 러시아군에 자금을 공급하는 PSB 은행 및 42개 자회사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고 서방 금융기관과 거래를 차단하기로 했다. 또 데니스 보르트니코프 VTB 이사회 의장, 페트르 프라드코프 PSB 최고경영자(CEO), 블라디미르 키리옌코 VK그룹 CEO 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들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러시아 정부의 신규 자금 조달이나 기존 국채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국채에 대한 포괄적 제재도 시행할 방침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하원에서 러시아 은행 5곳(로시야 은행·IS 은행·겐뱅크·프롬스뱌지뱅크·흑해은행)과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올리가르히(재벌) 3명에 대해 영국 내 자산동결, 영국 개인·기업과 거래 금지, 입국금지 등의 제재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영국은 또 돈바스 지역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러시아 하원의원들을 제재 대상에 올리고 기존의 크림반도에 적용하던 제재를 돈바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런던 금융시장을 통한 러시아의 국채 발행도 차단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에서 독일로 직결되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승인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는 독일이 러시아에 취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제재 중 하나로 꼽힌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EU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러시아에 대한 비자금지와 자산동결 제재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제재 대상은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러시아 하원의원 351명, 우크라이나 영토보전과 주권·독립을 약화하거나 위협하는 데 관여한 개인 27명과 기관들이다. 러시아 의사 결정권자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은행들과 돈바스 지역 다른 사업체들도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전화상으로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 양국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캐나다는 러시아 하원의원들과 국영은행 등에 대한 은행 거래를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일본도 러시아 정부와 정부 기관이 발행하거나 보증하는 채권의 일본 내 발행 및 유통 금지, 돈바스 지역 친러 분리주의 공화국 관계자 비자 발급 중단 및 일본 내 자산동결 수출입 금지 등의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주요 7개국(G7)은 이날 전화로 긴급 외교장관 회의를 열고 러시아의 행동이 우크라인의 주권을 침해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동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다만 미국과 유럽이 내놓은 이번 1차 제재가 러시아에 줄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방이 고강도 제재는 러시아의 본격적인 군사행동 개시 이후로 미뤄놨고 러시아도 2014년 크림반도 강제합병 이후 서방의 제재에 대한 내성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제재가 2014년보다 약하다면서 “러시아라는 성채의 표면을 긁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서방 지도자들은 이번 제재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만약 러시아가 긴장을 고조시키면 제재도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어떤 러시아 금융기관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바이든 정부는 많은 나라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가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존슨 총리는 “이것은 우리가 준비한 제재의 시작”이라면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도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방은 그동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러시아 금융기관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퇴출, 스마트폰·항공기·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주요 부품을 비롯한 물자의 러시아 수출통제 등 고강도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 위협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였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상원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친러 반군이 이 지역에 세운 자칭 도네츠크공화국(DPR)과 루간스크공화국(LPR)공화국의 영토를 우크라이나 정부가 관할하는 돈바스 지역 전체로 확대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제재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반응을 내놨다.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다른 회의에 참석하느라 바이든 대통령이 제재 방안을 밝힌 연설 중계를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노르트스트림2 중단에 대해 “유럽인들이 (천연가스 가격으로) 1000㎥당 2000유로(270만원)를 지불해야 하는 신세계가 도래한 것을 환영한다”고 조롱했다. 아나톨리 안토노프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는 주미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에서 “제재 위협으로 러시아가 외교 정책을 수정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워싱턴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전 세계 금융·에너지 시장에도 타격을 줄 것이라면서 “미국의 일반 시민들도 가격 상승의 결과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23일 성명을 내고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의) 제재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있을 것”이라면서 “미국 측에 대해 대칭적일 뿐만 아니라 잘 조율되고 세심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화를 통한 해결 노력은 사실상 중단됐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과 회담 후 기자회견을 열어 24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기로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는) 현시점에서 라브로프 장관과 만남은 더는 의미가 없다”면서 러시아 측에 회담 취소를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고 말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러시아가 경로를 바꾸지 않는 한 외교는 성공할 수 없다”면서 바이든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도 사라졌다고 밝혔다. 미·러의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노력했던 프랑스도 오는 25일 장이브 르드리앙 외교장관과 라브로프 장관과의 만남이 없던 일이 됐다고 밝혔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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