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 전면전 대신 봉쇄 전략 수순
서방 “전쟁 오래갈 듯…대책 마련해야”
한 여성이 3월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루마니아 접경도시 시레트로 들어서면서 품에 안은 아이에게 키스하고 있다. 시레트|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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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사수하려는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러시아군은 전면전 대신 일부 군사 요충지 점령 후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봉쇄 전략 수순에 돌입했다. 러시아 정부가 시리아 전투원들까지 끌어들이면서 전쟁이 더욱 격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서방에서는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전략 수립,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승인 등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군, 헤르손 장악으로 전세 역전
러시아군은 북부전선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개전 초기만 해도 대대적인 공습을 앞세워 키이우 인근 우크라이나 군사시설을 잇따라 무력화하며 속도전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러시아군의 예상과 달리 매우 거센 데다가 키이우로 향하던 탱크 행렬이 연료 부족으로 멈춰서는 등 병참 문제까지 노출하며 고전 중이다.
다른 북부 도시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3월 7일(현지시간)에는 우크라이나군에게 제2도시 하르키우 인근의 동부 소도시 추후이브를 내줬다. 북동부 도시 수미, 벨라루스와 국경을 접한 북부 도시 체르니히우를 포위하고 있긴 하지만, 개전 11일 만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겠다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여기에 북부 도시 외곽에서 작전을 펼치던 고위 장성들이 잇따라 사살되면서 군 사기도 저하될 것으로 보인다.
남부전선은 3월 3일 항구도시인 헤르손 장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헤르손은 인구 30만명으로 규모가 크지 않지만, 친러 반군세력 간 연결통로가 될 수 있고 주요 수원 통제지역이기 때문이다. 알자지라는 “우크라이나에는 뼈아픈 패배로 이번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군으로선 우선 친러 반군세력 집결이 수월해졌다. 헤르손은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중 러시아가 2014년 침공·병합한 크름반도에 가장 가깝다. 러시아군이 남동부의 다른 항구도시 마리우폴까지 장악한다면 친러 반군세력의 집결지인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연결된다.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에 분리돼 있던 친러 반군세력이 모여 지원사격에 나서면 러시아군의 진격 속도가 한층 빨라질 수도 있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장악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러시아군이 아조프해와 면한 마리우폴까지 장악한다면 흑해와 아조프해로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남동부 해상 보급선은 끊기게 된다. 서쪽으로 더 뻗어나가 흑해에 면한 우크라이나 제2의 항구도시 오데사까지 장악한다면 해상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러시아군은 헤르손 장악으로 수원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병참기지로서 크름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한층 더 높일 수 있게 됐다. 드니프로강과 흑해를 잇는 헤르손은 러시아가 병합하기 전 크름반도로 담수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4년 크름반도가 러시아에 넘어가자 크름반도를 고립시키기 위해 북크름 운하를 댐으로 막았다. 이로 인해 크름반도에 공급하는 담수량이 80% 넘게 줄었다. 러시아 정부는 크름반도 주둔 흑해함대에 담수를 제공하기 위해 본토에서 급수차를 공수하기까지 했다. 러시아군은 헤르손 진입 첫날 댐을 무너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 내전 데자뷔
러시아 정부는 3월 8일 마리우폴을 비롯해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수미, 하르키우 등 5개 도시에서 민간인 탈출을 위한 인도주의 통로가 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피 민간인들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할지는 미지수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와 두 번의 협상 끝에 인도주의 통로를 통한 민간인 대피를 허용했지만 이내 러시아군이 공격을 재개하면서 무산시킨 바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인도주의 통로로 채택한 도로에 지뢰를 깔았고, 민간인 대피용 버스 여러대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서도 그랬듯이 인도주의 통로를 통해 민간인들을 탈출시키고 나면 대대적 군사 공격으로 해당 지역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전멸시킬 거라고 본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 기간에 시리아 정부군과 함께 이들리브·알레포주 등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 동안 체계적으로 포위하는 전략을 택했다. 러시아·시리아군은 이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몰아낸 뒤 공습, 포격 등으로 군사시설은 물론 민간 인프라까지 붕괴시키며 거의 초토화시켰다.
러시아 정부가 시리아 전투원들까지 끌어들이면서 전쟁 격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월 6일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가 최근 시리아에서 우크라이나군에 맞서 싸울 전투원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러시아군의 상당수가 징집병이어서 시가전 역량이 떨어지지만, 시리아 전투원들은 10년 가까이 시가전 경험을 쌓아왔다고 분석했다.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의 제니퍼 카파렐라 연구원은 시리아 내전 중 활약한 러시아 준군사조직 ‘그루파 바그네라’의 전례를 감안할 때 이들이 러시아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공원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의용군이 러시아군 침공에 대비한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키이우|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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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장기전 대비해야”
서방 국가들 사이에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미닉 라브 영국 부총리 겸 법무부 장관은 3월 6일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임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우크라이나에서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전쟁이) 몇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달은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전쟁이 오래갈 것”이라며 경제적 대비를 강조했고,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전이 몇년간 지속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러시아가 키이우를 장악하고 괴뢰 정부를 세울 경우에 대비해 장기 게릴라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에밀리 하딩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반란전(insurgencies)이 성공하려면 8~10년의 기간이 필요하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은 ‘10년 지원’ 전략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다른 동유럽 국가들까지 위협하는 더 비관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설립 지원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위 관료들과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로 옮겨가거나 폴란드로 피신해 정부를 꾸릴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러시아의 침공 전부터 조 바이든 정부가 우크라이나 망명정부 승인 등 장기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제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등 독일 나치 정권이 점령한 국가 관리들이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연합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했던 망명정부 모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브라이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경제지원을 유지하기 위해 (망명정부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다수의 국제기구는 런던, 폴란드 바르샤바 등 유럽국 수도에 정부를 차릴 수 있는 합법정부와만 거래할 수 있다. 유럽 외교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워싱턴포스트에 “이달 초 유엔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은 젤렌스키 정부를 우크라이나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더 이상 영토를 통제하지 못할 경우에도 존속시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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