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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김태호, 나영석, 박진영, 방시혁, 서태지, 싸이, 양현석, 연상호, 황동혁.”
위 10인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우선 대중문화 종사자라는 답이 나올 게다. 그다음엔? 이 질문엔 생각이 좀 필요하겠지만, 대중문화 애호가라면 ‘X세대(1970년대생)’라는 답을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X세대 열풍’을 기억하실 게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1975년생 작가인 김민희가 최근 출간한 <다정한 개인주의자: K-컬처를 다진 조용한 실력자 X세대를 위하여>는 X세대가 K컬처(한류)의 주역임을 밝힌 책이다. 위에 언급한 10인의 이름은 화려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대중문화는 거의 X세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의 경우 봉준호(1969년생)와 이병헌(1970년생)처럼 한 살 위아래까지 X세대의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면, X세대 감독이 1000만 관객 영화 15개 중 13개를 만들었다는 통계가 나온다.
우리 인간이 문화만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엔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권력투쟁이 있다. X세대는 권력투쟁에 능한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김민희는 2021년 6월과 11월 ‘집단적 기회상실에서 오는 허탈감’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6월11일 헌정사상 최초로 30대 정치인인 이준석(1985년생)이 제1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약 5개월 후인 11월17일 1981년생인 최수연이 국내 최대의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CEO에 내정되었다. 네이버의 이전 수장은 1967년생 한성숙이었는데, 왜 1970년대생을 건너뛰고 1980년대생에게 권력이 넘어간 걸까? 당시 제1야당엔 1970년대생 정치인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단지 우연일 뿐인가?
김민희는 X세대가 ‘한류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세대론과 연결시켜 논의함으로써 그간 다른 영역에선 ‘계급론’의 매서운 질타를 받곤 했던 ‘세대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선 사실상 세대론을 옹호한 효과를 낸 미국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2008)라는 책부터 감상해보자.
X세대, 그 ‘특별한 이유’의 힘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탁월한 사람들)의 역사를 구분 짓는 진정한 요소는 그들이 지닌 탁월한 재능이 아니라 그들이 누린 특별한 기회”라고 했는데, 그가 심혈을 기울여 논증한 한 사례를 보자.
개인컴퓨터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는 1975년이다. 이 혁명의 수혜자가 되려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이른 사람이 가장 유리했다. 실제로 미국 정보통신혁명을 이끈 거물들은 거의 대부분 그 시기에 태어났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에릭 슈미트 등은 1955년생이며 다른 거물들도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태어났다.
개인컴퓨터혁명이 미국에 비해 10여년 늦은 한국에서는 서울대 공대 86학번 3인방(김범수·이해진·김정주)이 사실상 인터넷을 지배했다. 이들을 비롯해 이재웅 등과 같은 컴퓨터·인터넷 분야의 거물들은 대부분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태어났다. 나중에 1970년대생들도 정보통신혁명에 뛰어들었지만, 1960년대 후반생들만큼 압도적인 우위를 누리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생들, 즉 X세대에 열린 새로운 기회는 영상혁명이었다. 1992년 통계청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 인구 가운데 20대 이하는 44%, 30대 이하를 따지면 62%에 이르렀다. 이 62%의 인구는 이른바 ‘TV세대’였다. 이 시점에서 한국 TV역사는 30년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의 TV수신기 보급이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에선 20대 초반까지의 인구를 ‘TV세대’로 볼 수 있었다.
TV세대는 곧 ‘소비대중문화세대’였다. 그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광고도 대중문화의 일부로 간주했다. 실제로 광고는 ‘진보’를 거듭해 우수한 영상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시인 이승훈은 1993년 “최근의 카피문화나 광고문화는 놀라운 데가 많다.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광고다. 문안도 신선하려니와 그림이나 이미지 역시 예술작품 뺨칠 정도로 감동적인 것들이 많다”고 했다. 1993년 SBS TV 3기 신인 탤런트 시험엔 20명 모집에 7578명이 몰려 38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는데, 최종 합격자 17명 가운데 전체의 70%인 12명이 전문 광고모델이었다.
바로 이 1990년대 초반의 시기에 ‘한류’라는 작명도 이루어지면서 한류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낸 X세대가 한류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그들에게 ‘상업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심각한 지식인들은 한류가 쌍방향의 문화교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한류는 상업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 X세대가 당당한 사업 프로젝트로 추진한 것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문화교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인생을 건 사업엔 목숨 이상의 것을 걸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류와 관련해 X세대에 대한 김민희의 주장을 요약해보자면 다음 네 가지 명제로 압축할 수 있겠다.
첫째, X세대는 ‘두 자녀 시대’를 맞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개인주의 품성을 키워나간 세대다. 둘째, X세대는 ‘탈이념, 탈정치’라고 하는 세계사적 변화에 발맞춰 소비주의 문화, 취향 문화, 팬덤 문화와의 친화성을 보여준 세대다. 셋째, X세대는 균형감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면서 권력과 연고주의에 무관심했기에 사회적 경쟁에서 권력과 연고주의에 집착한 86세대에 밀려났고, 그래서 더욱 문화 쪽으로 눈을 돌린 세대다. 넷째, X세대는 개발도상국의 감수성을 가진 86세대와 선진국 감수성을 가진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 낀 세대로서 서로 다른 세대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세대다.
영상혁명과 ‘빠순이 헌신’도 큰 몫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199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X세대 열풍’을 떠올린 것까진 좋았는데, 그간 그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다른 사람들은 다 잊더라도 내가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나에게 90년대는 30대 후반과 40대 전반의 시절이었다. 열정이 넘치던 나는 당시 대중문화 비평도 열심히 하면서 X세대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책 몇 권의 분량은 되었을 게다. 그랬던 내가 X세대를 잊다니! 게다가 나는 <한류의 역사>라는 두툼한 책을 썼음에도 90년대의 신세대 문화만 소개하는 데에 그쳤을 뿐, X세대가 한류의 주역이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그저 다음과 같은 수준의 ‘빠순이 옹호론’에만 머물렀을 뿐이다.
“빠순이 없는 대중문화를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허전하고 무료할까? 빠순이는 분명 대중문화를 키우는 젖줄이다. 열정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까지 갖다 바침으로써 대중문화가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전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빠순이들의 헌신이 없이 가능했겠는가? 빠순이를 폄하하려면 한류 열풍도 폄하하는 게 옳다. 근데 어찌하여 기성세대는 한류 열풍에 대해선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하면서 그걸 가능케 한 원동력을 제공한 빠순이들에 대해선 그리도 눈을 흘기는가?”
나는 하이브 이사회 의장 방시혁이 3년 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뜻밖에도 빠순이를 적극 옹호하고 나선 건 그가 1972년생으로 전형적인 X세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K팝 콘텐츠를 사랑하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팬들은 지금도 ‘빠순이’로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처한 상황은 상식적이지 않았고, 그것들에 분노하고 불행했다”며 “이제는 그 분노가 나의 소명이 됐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한류의 역사> 개정판을 낼 때에 반드시 김민희의 주장을 참고해 X세대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련다. X세대는 “개성과 자유분방, 탈권위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첫 시민 세대로서, 나다움을 잃지 않고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온 세대”라는 김민희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면서, 뒤늦게나마 ‘한류의 주역’인 X세대에 경의를 표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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