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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꿈꾼 혁명당은 주권을 회복한 후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 전 세계서도 이를 실현하는
곧‘대공주의’ 정당이었다
그의 꿈은 오늘날 위태로운 한국의 현실과 연결해도
매우 현재적 의미가 있다 안창호 ‘대공주의’ 이념은
위태로운 현실을 극복하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는 우리의 정신 자산이자 시대의 좌표다
흥사단(興士團)은 미주 한인사회를 결집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수양단체로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됐다. 흥사단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다. 1945년 이전에 설립된 사회단체 가운데 지금까지 존속하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단체인 것이다.
단체의 생명력은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의 가르침에서 나온다. 도산은 개인의 수양이 곧 독립이라는 신념을 갖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헌신한 분이다. 일제는 그를 ‘실력양성 준비론파’로 분류했다. 사실 도산에 대한 비슷한 규정은 해방 이후에도 그를 따랐던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재생산되었고, 역사학계도 도산을 실력양성론자, 외교론자로 오랫동안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도산이 실력양성론 또는 준비론을 주창한 민족개량주의자이며, ‘민족해방투쟁의 기본 형태’인 ‘폭력투쟁에 대해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 전략 차원의 독립전쟁을 기획하다
그런데 흥사단은 스스로 독립운동 단체임을 표방한 적이 없다. 비록 도산에게 흥사단은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인재 양성의 저수지였지만, 흥사단원들도 조직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흥사단을 중심에 놓고 분석하면 다소 편향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오히려 도산이 그리는 ‘독립전쟁’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가 주창한 ‘민족혁명’을 심도 있게 따져봐야 한다. 뜻밖에도 이에 대한 분석은 아직 풍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춘원 이광수에 따르면 도산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에 미국을 떠나 연해주로 향했다.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를 목적지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5월에 상하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조직을 정돈했다. 그는 3·1운동 당시 각료 명단이 있는 6개의 인쇄물에 모두 이름이 들어간 사람이었다. 6월28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안창호는 하비로 321호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매일 오전 9시 애국가를 부른 후 업무를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분열’이란 말이 설 자리가 없었다.
도산은 내무총장 취임 연설 때 주권을 되찾고 ‘모범적 공화국’을 세워 동양평화를 견고히 함으로써 세계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장차 외교를 계속하되 반드시 군사적 준비를 갖추어 ‘적어도 내 강토 안에서 독립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했다. 도산의 구상은 12월 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대시정방침’으로 구체화했다.
아쉽게도 이광수가 기억하는 원고지 120장 분량의 시정방침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 1920년 1월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특히 1월3일 민단에서 주최한 신년축하회 때 도산이 긴 시간의 연설로 방침의 일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도 임시정부가 결정한 독립운동 진행 방침의 정신과 비밀스러운 일부 핵심 내용을 비공식적으로 알렸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도산의 연설을 ‘독립운동책의 비공식적 발표’로 간주했다. 실제 이 연설문은 1905년 이래 항일운동가 사이에서 처음 제시된 전략 차원의 종합적인 독립전쟁계획서였다.
도산은 신년축하회 연설 때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규정했다. 일치단결하여 6대 사업, 곧 군사, 외교, 재정, 교육, 사법, 통일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준비해야 한다며 세세하게 설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6대 사업을 ‘독립운동의 6대 강령’이라고 불렀다.
도산이 말하는 준비는 일제의 역량에 버금갈 만큼의 군비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군사 경험자를 조사해 통일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국민개병(皆兵)주의에 입각해 군인을 모집하는 준비였다. 실제 임시정부는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의 독립군을 대상으로 조직 개편 활동을 벌여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안창호는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만세운동을 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선전활동을 벌이는 ‘평화적 전쟁’ 노력도 독립전쟁 준비로 간주했다. 그에게 독립전쟁이란 무장투쟁만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외교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확인된다. 도산은 독립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세계의 동정을 얻는 외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을 만큼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일환으로 외교를 중시했다. 안창호는 준비론만을 말하는 실력양성론자, 외교만을 수행하려는 외교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상하이의 한인들은 임시정부에서 1920년 어느 시점에 독립전쟁을 선언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심지어 ‘내년 신년축하회를 한성에서 열고야 만다’거나, ‘올해 1년 안에 신성한 국토를 회복하고야 만다’는 희망 섞인 기대와 결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독립전쟁에 대한 매우 낙관적인 정세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10월에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북간도에서 밀어낸 데 이어 경신년대학살까지 일으키자, 분위기는 분노와 좌절감으로 뒤바뀌었다. 독립전쟁 준비가 좌절되자, 당원이 납세와 병역 의무를 지는 대(大)독립당을 건설하자는 대안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곧바로 나왔다. 종합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독립전쟁 준비는 진척이 없었고, 월세 내기도 벅찰 만큼 임시정부의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2. 민족혁명의 추구와 현재성
상황의 반전은 1926년 7월4일부터 시작됐다. 중국국민당의 장제스가 통일된 국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북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안창호는 7월8일 밤 한인교회인 삼일당에서 ‘우리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정세의 급반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민첩하게 움직인 결과였다.
도산은 민족혁명이란 일본인의 압박 현상을 파괴하고 민족의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하는 현상을 만드는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이때 그가 말하는 혁명은 정치혁명, 경제혁명, 종교혁명처럼 부분 혁명이 아니었다. 대한 사람이면 어떤 주의나 주장을 불문하고 일본에 대항하며 새로운 민족적 현상으로 바꾸어 가는 혁명을 가리켰다. 도산은 이러한 민족혁명을 성공하려면 이념, 출신지, 신분, 재산 등등을 묻지 않고 모이는 범위를 최대한 넓히면서 대혁명당에 결집해야 한다고 보았다.
긴 시간의 강연을 끝낸 도산은 베이징을 시작으로 중국 본토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사람이나 사회주의자들까지 만나 대혁명당을 조직하자고 설득했다. 1926년 말에는 만주에 가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의 관계자도 만나 통합을 촉구했다. 그러다 만주 군벌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때까지 그가 만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대혁명당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동참했다. 역사에서는 이걸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이라 불러왔다.
안창호가 지향하는 대혁명당의 이념은 민족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이념을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다고 고백했지만, 공산주의를 무조건 배격한 것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까지 반공을 잣대로 도산의 사상적 지위를 특정해왔던 주장들은 그가 말하는 ‘혁명’을 제대로 보지 않은 편견에 불과하다. 아무튼 도산이 자신의 사상적 지점을 중도에 둔 이유는 단순히 역학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산은 대한민족 전체가 빈민화하고 있다는 현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부자와 빈자, 무산자와 유산자를 구분하기보다 빈민화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혁명이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도산의 상황인식은 이후 상하이의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국민당, 충칭의 한국독립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정세를 분석하고 운동론을 전개할 때 기본 토대로 자리 잡았다.
도산식 민족혁명 과정을 거쳐 주권을 회복한 모범적 공화국이라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대결보다 협력과 경쟁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창호도 ‘대생산 기구의 국가 공유’를 실현하는 모범적 공화국을 상정했다. 실제 식민지 조선의 대공장은 거의 대부분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소유였으므로 신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국가경제가 국민경제를 주도하는 시스템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안창호가 선도한 대혁명당 촉성운동은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적대적 대결 때문이었다. 이에 상하이의 민족주의자들은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한국독립당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을 건설’하겠다고 강령을 내걸었다. 균등론을 내세운 조직에 안창호도 참가했다.
그런데 안창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31년 들어 좌우를 망라해 전 민족을 대표할 통일적 혁명당을 결성하고자 움직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꿈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1932년 4월 꺾이고 말았다. 윤봉길 의거 때 일제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안창호가 꿈꾼 혁명당은 주권을 회복한 후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도 이를 실현하는 정당, 곧 ‘대공(大公)주의’ 정당이었다. 안창호의 꿈은 오늘날 한국의 현실과 연결해 보아도 매우 현재적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화하며 민주주의가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또 한반도의 견고한 분단체제가 동아시아에서 주요 2개국(G2)의 대결구도를 더 고착화시켜 스스로를 계속 옥죄고 지역의 불안정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대공주의’ 이념은 이처럼 위태로운 현실을 극복하고 한반도와 ‘지역으로서 동아시아’의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우리의 소중한 정신 자산이자 시대의 좌표다.
신주백 역사학자 |
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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