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애송이에게 우리의 자존심을!?”...와인 한 잔에 매국노가 된 사연 [전형민의 와인프릭]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76년 5월 24일, 프랑스 파리의 인터콘티넨탈호텔. 11명의 와인 평론가들이 길게 늘어선 탁자에 줄지어 앉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와인을 시음합니다. 와인잔에 담긴 와인을 제외하면 탁자 위에는 그 와인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일체 존재하지 않은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었습니다.

지켜보는 눈도 별로 없고, 테이스팅하는 와인도 화이트와 레드 각각 10종씩 20종에 불과했던 평범한 와인 테이스팅 행사 같았는데요. 훗날 이 이벤트는 와인 업계에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영향력을 미치게됩니다. 와인의 세계에서 대명사처럼 불리던 전제가 이날 이후로 산산히 부숴지게 되거든요.

오늘은 1976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펼쳐진 사건, 자타공인 세계 최고였던 프랑스 와인들이 당시만 하더라도 변방, 이제 막 와인 산업을 시작하는 애송이 수준이었던 뉴월드(여기서는 미국을 지칭) 와인 앞에 무릎을 꿇은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매일경제

파리의 심판에서 시음 중인 심사단. 미슐랭 3스타 음식점의 수석 소믈리에와 최고급 와이너리 소유주, 프랑스 와인 등급 체계 위원회 수석 감독관 등 당대 최고의 프랑스인 와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사진=ridgewine.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언어유희로 세상에 알려진 세기의 테이스팅
파리의 심판? 신화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맞습니다. 파리의 심판은 사실 고대 그리스 신화 나오는 얘기 중 하나입니다. 파리스(Paris)는 도시 이름이 아니고 트로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의 이름이죠. 영화에서는 세기의 미남, 올랜도 블룸이 연기했던 그 캐릭터 입니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인데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며 두고 간 황금사과를 두고 자존심 강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등 세 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자 이들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판정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는데, 이는 아프로디테가 ‘스파르타 왕의 아내였던 절세미녀 헬레네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죠.

결국 파리스는 헬레네와 트로이로 돌아오고 절세미녀를 뺏긴 셈이 된 그리스는 격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처음 호각을 이루던 전쟁은 아킬레스의 그리스 진영 참전과 트로이 목마 작전 등 그리스의 전략에 힘입어 트로이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를 미국 타임지(Time)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조지 테버(George Taber) 기자가 파리(Paris)에서 발생한 와인 테이스팅 결과에 언어유희로 가져다 붙이면서, 이 사건은 와인 업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된 겁니다.

재밌는 것은, 조지 테버가 이날 행사장에 취재를 나온 유일한 기자였다는 점입니다. 다들(타국에서 온 특파원들까지도!) ‘당연히 프랑스 와인이 이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시덥잖은 행사엔 참석 자체를 하지 않은 겁니다. 결국 조지 테버가 조금 더 호기심이 많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세기의 특종을 단독으로 건지게 된거죠. 기자는 현장에서 답을 찾는다는 유수의 기자 선배님들의 말씀이 맞았던 장면이 아닐지.

매일경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가운데)를 황금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림=‘Judgment of Paris’, Peter Paul Rubens(1636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무너진 프랑스의 자존심
평론가들을 초청하고, 이 행사를 기획한 인물은 34세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였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와인숍과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캘리포니아 와인의 수준이 프랑스의 대표 와인을 얼마만큼 따라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캘리포니아와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을 블라인드로 비교해 시음하는 행사를 기획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티븐 스퍼리어 본인과 그의 미국인 사업 파트너 패트리샤 갤러허(Patricia Gallagher)를 제외하면 심사단은 전원 프랑스인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면면이 보통 화려한 게 아닙니다. 도멘 드 라 로마네꽁띠(DRC·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의 소유주와 샤또 지스쿠르의 소유주, 보유 와인 리스트만 수백장에 달하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뚜르 다정(Tour d’Argent)의 수석 소믈리에, AOC(원산지 통제 명칭·프랑스 와인 등급 체계) 위원회 수석 감독관 등 당대 최고의 와인 전문가들이었죠.

시음은 오전(화이트)과 오후(레드)로 나뉘어서 진행됐습니다. 오전은 다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옆 사람과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면서 여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는데, 시음 결과를 들은 9명의 심사위원들은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미국 와인이었던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 1973(Château Montelena Chardonnay)가 총점 132점을 받아 2위였던 프랑스와인, 도멘 룰로 뫼르소 1등급 샴 1973(126.5점)보다 큰 점수차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오후 레드 와인 시음은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 속에서 이뤄집니다. 아마 심사위원들은 오전의 해프닝이 해프닝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 와인을 찾아내야하는 극한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을 겁니다. 자존심 센 프랑스인인 자신들이 더 맛있는 와인으로 미국 와인을 골라버린다면, 스스로 몸에 비수를 꽂는 꼴이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레드 와인 역시 미국의 스택스립 와인셀러 1973(Stag’s Leap Wine Cellars)이 1위로 발표됐기 때문이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심사위원 중 일부는 발표 직후 자신의 채점표를 돌려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 콧대 높던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던 순간입니다.

1976년 당시 결과가 알려지자 프랑스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심사위원들은 매국노로 몰리는 것은 물론 인터뷰를 회피하고, 한동안 숨어 지낼 만큼 조용히 근신해야 할 정도로 온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매일경제

1976년 5월 벌어진 파리의 심판에서 각각 화이트와 레드 부문 1등을 차지한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 1973(Château Montelena Chardonnay)와 스택스립 와인셀러 1973(Stag’s Leap Wine Cellars)의 모습. /사진=Smithsonian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0년 만에 성사된 재대결, 결과는…
재밌는 점은 30년이 지난 2006년 5월 24일 캘리포니아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재대결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매국노로 몰렸던 심사위원들은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캘리포니아 와인이 너무 프랑스 와인을 따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잘못된 테스트이다.”

“프랑스 와인은 기후 때문에 캘리포니아 와인 보다 서서히 풍미가 발전된다. 이 테스트는 옳지 않다.”

“5~10년이 지나 와인들이 더 숙성되었을 때라면 프랑스 레드 와인들이 훨씬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등의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프랑스 와인이 미국 와인에 비해 숙성과 풍미의 발현이 늦기 때문에 당시 3~5년 숙성된 와인으로 평가를 진행한 것은 프랑스 와인에게 불리했다는건데요. 이를 빌미로 30년 만에 성사된 재대결이죠.

1976년 파리의 심판 행사를 주관했던 스티븐 스퍼리어가 이번 행사도 주관했고요. 30년 전에 쓰였던 것과 정확히 같은 레드와인을 썼습니다. 빈티지도 당시 빈티지였으니 다들 30년 이상 묵힌 와인인 셈이죠. 화이트는 숙성의 한계 등 여러 이유로 이번엔 테이스팅에서 빠졌습니다.

심사위원은 유수의 MW(Master of Wine·전세계에 100명 내외 극소수만 존재하는 와인 최고 권위자)와 마스터 소믈리에로 구성됐습니다. 스티븐 스퍼리어는 “이번에야말로 보르도 와인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더 처참하게 끝나버립니다. 1976년 당시 사용했던 빈티지의 똑같은 와인을 가져와 테이스팅을 했는데, 1~5위까지 전부 미국 와인이 차지합니다. 1976년 당시 그나마 1등만 내주고 2, 3, 4등을 가져왔던 과거보다 더 처참해진 성적이죠. 프랑스 언론들은 이날을 ‘치욕의 날’이라고 대서특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2008년 개봉한 와인 미라클(영어제목 Bottle Shock)인데요. 일부 각색이나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만 볼만한 와인 영화를 추천한다면 빠지지 않는 영화입니다.

매일경제

1976년 당시 사건을 다룬 Time지. 파리의 시음회가 벌어진 후 2주 뒤인 1976년 6월 7일 출간됐다. 기사를 쓴 조지 테버는 그날 행사를 취재한 유일한 기자였다. 이래서 뉴스는 항상 현장에 있다고 하나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리의 심판이 남긴 것…편견과 선입견의 폐해
사람은 누구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아무리 공정하려고 해도 일정 부분은 기존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죠. 주변 사람들의 평가, 예전부터 내려오는 명성, 막연한 추측 등 우리가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엔 이미 너무 많은 데이터가 산재해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와인의 세계도 편견과 선입견이 존재합니다. 인류와 함께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다보니 일부 유럽의 전통 와이너리에서 수백년간 켜켜이 쌓인 평가와 그렇게 쌓아올린 유물들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지금처럼 각종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도 무시하지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곤 합니다.

프랑스 와인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좋은 와인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정말 광오한 말이지만 ‘프랑스 와인이 아닌 와인은 와인이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와인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죠. 지금도 이런 기조는 유지됩니다. 도대체 누가 DRC와 보르도의 5대 샤또를 저평가할까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죠.

프랑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습니다만, 이 사건 덕분에 와인 산업은 한 차례 큰 발전을 이뤄냅니다. 모든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기조를 따라갈 필요가 없어지고, 프랑스 와인만이 최고로 평가되던 시대도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후발주자였던 뉴월드 와인 업계가 추구하던 과학기술을 활용한 지속적인 품질개량 노력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파리의 심판을 “프랑스 와인이 우월하다는 신화를 깨고 와인 세계의 민주화를 이뤄낸, 와인 역사상 중대한 분기점”이라고 표현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도 진행형입니다. ‘와인은 비싸기만 한 술’, ‘허세와 위신을 위한 술’이라는 와인을 향한 편견도 있죠. 전 인류가 가장 광범위하게 즐기는 술인 데도요. 그러니 이번 주말은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고 와인을 한 번 드셔보셔요. 좋은 와인 한 잔의 여운이 독자들께 위안을 줄 겁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