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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침묵했던 여성 작가[이은화의 미술시간]〈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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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고 인상적인 나무 조각이다. 세 여자, 어린 소녀, 강아지가 나란히 서 있다. 가운데 여자 얼굴엔 여성의 흑백사진이 붙어 있고, 양옆 두 여자는 얼굴이 여러 개다. 모두 눈은 크게 뜨고 있지만 입은 꼭 다물었고, 상자에 갇힌 듯이 포즈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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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과 개’(1963∼1964년·사진)는 베네수엘라계 미국 조각가 마리솔의 대표작이다. 본명은 마리솔 에스코바르인데 ‘마리솔’로 불린다. 그녀는 1960년대 미국 팝아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1980년대 이후로는 거의 무명으로 전락했다.

이 작품은 중산층 여성들과 아이, 개의 모습을 모방해 표현했다. 나무를 깎고 색을 칠하고 천이나 박제 개, 신문 등을 조합해 만들었다. 마리솔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작품에 종종 등장시키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운데 여성이 바로 자신이다. 흑백사진 속 얼굴도 그녀다. 외출복 차림인 두 여성과 달리, 그녀는 머리띠에 앞치마를 둘렀다. 여자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탐색하지만 행동할 손이 없다. 핸드백 들 손만 있다. 이는 소비주의를 상징하는 것일 터. 작품은 여성의 역할을 소비와 가사로 한정 짓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비판하고 있다.

마리솔의 작품 속 여성들은 이렇게 틀에 갇혀 침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의 비극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열한 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충격으로 다시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리솔은 실제로 평생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침묵을 삶의 필수 요소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작품들은 많은 말을 한다. 심지어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페레즈 미술관은 2022년 마리솔과 앤디 워홀의 2인전을 여는 등 이제야 그녀를 워홀과 동급의 팝아트 작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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