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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목)

[김순덕 칼럼]지금이 용산서 고기 만찬 먹고 박수 칠 시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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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王도, 포도대장도 아니다

지지율 20% 尹, 무조건 협조 구할 때

과거 대통령-당 대표들 주례독대

신뢰-문제해결 위해 뭔들 못하랴

동아일보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용산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만찬을 마치고 한동훈 대표, 추경호 원내대표 등과 산책을 하고 있다. 2024.9.24.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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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21일 청와대 당정회의. 전날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노태우 대통령이 “방미 성과 홍보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며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 톱이고 자신의 미국 의회 연설은 한쪽에 밀린 것을 보니 대통령 할 생각이 없어지더라는 거다.

그러자 노재상(당시 67세) 강영훈 총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각하께서는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데 국내가 그 꼴이어서 송구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준규 민정당 대표도 울먹이며 “연말까지 당이 책임지고 5공 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온 당7역은 당 대표실에서 설렁탕 점심을 하면서 한참을 더 논의했다.

여기까지가 박철언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쓴 풍경이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 남재희(15일 작고)가 ‘시대의 조정자’에 쓴 내용은 좀 다르다. 강 총리가 아주 작은 반정부 데모를 보고하며 흐느껴 울자 놀란 박준규도 흑흑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상한 장면을 연출하고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박준규가 한마디 하더란다. “그 사람 와 우노. 그 사람이 우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체코 원전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국민의힘 지도부를 만났다. 용산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만찬을 함께 한 윤 대통령이 설마 이런 ‘충성의 분수’를 기대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찬에 앞서 한동훈 대표가 요청한 대통령 독대를 대통령실은 거부했다. 신임 지도부를 격려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라지만 웃기는 소리다. 마음만 있으면 따로 독대할 기회는 얼마든지 마련한다.

다른 관계자는 “오늘내일은 대통령과 체코의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로 만찬에서 주로 말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었고 내용도 거의 원전 얘기였다는 후문이다. 대통령은 외국에서 일하시는데… 하며 흐느끼는 사람만 없었을 뿐, 시계를 35년 전으로 돌려놓는 후진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 “독대는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거부한 대통령실은 독대를 제왕의 시혜처럼 생각하는 전근대적 집단 같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돈봉투와 충성 또는 특혜가 오갔을 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동훈을 신뢰할 수 없고,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이 그리 한가한 시국인가. 대통령은 아프거나 다쳐도 주치의가 있어 걱정 없다. 국힘 의원들은 문자 한 통으로 알음알음 ‘의사 빽’을 찾을 수 있겠지만 보통 국민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명색이 집권당인 국힘은 새 지도부 구성된 지 근 두 달간 뭘 한 게 있다고 국민 혈세로 세비 받고, 소고기 돼지고기 만찬을 대접 받으며 박수 치고 격려까지 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한동훈이 고기 덜 먹는 한이 있어도 대통령 독대를 청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초대 비서실장으로 ‘독대의 매뉴얼’을 만든 김중권은 “대통령이 독대를 해야 진실 파악도, 사태의 심각성도 빨리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2016년 한 인터뷰에서다.

2016년 총선 때 새누리당(현 국힘) 대표 김무성은 대통령과 독대를 못했던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최순실 사태가 났을 때 저희 같은 사람을 만나 대화했다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올 초 방송에서 개탄을 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는 당시 김 대표가 면담이나 통화를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써놨으니 통탄할 일이다.

야권에선 함부로 탄핵을 입에 올리지만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반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겼어도 구중궁궐은 그대로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 개원식에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 국회 불출석을 건의했다니,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수석 출신 국힘 의원은 “영부인은 대통령 국정을 보완하는 자리”라며 “영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국민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신민(臣民) 같은 소리를 했다. 자칫하다간 대통령 부인 비판은 반(反)국민행위로 처단될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조선시대 왕(王)이 아니다. 포도대장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외친다고 전공의가 벌벌 떨며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다. 국정수행 긍정률이 달랑 20%(갤럽)인 대통령이면 여유만만 한동훈과 독대를 고려할 때가 아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윤 대통령은 진작, 한동훈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독대 아니라 더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정 운영을 위한 협조를 구해야 마땅하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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