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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최은미의 마음 읽기] 내일도 새들이 노래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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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최은미 소설가


2021년 양재동의 한 독립서점에서는 매달 ‘작가노트’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책에는 쓰이지 않은 창작 과정의 일들을 작가가 독자들과 나누는 자리였다. 한 달에 한 번 줌 라이브로 진행된 행사에서 작가들은 취재 중에 찍었던 사진이나 영감을 준 자료들, 구상의 단초, 메모 노트나 아끼는 키보드 같은 것을 소개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일반적인 북 토크와 달리 쓰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고민과 변화들을 내밀하게 나누는 자리여서인지 그 자리는 왠지 독자 못지않게 작가들을 위한 자리 같기도 했다. 행사를 연 곳은 소설가 한강이 운영하는 서점 ‘책방 오늘’이었다.



한강의 ‘책방 오늘’서 독자와 만나

언어로 못 전한 진실 나누는 자리

서점 건물에 간판 대신 붙은 문구

계속 쓰겠다는 기도의 마음 담아

중앙일보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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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를 받은 달이 11월의 작가노트여서 행사를 위해 서점에 갔을 때는 겨울로 들어선 계절이었다. 행사가 진행된 곳은 서점 공간 한쪽의 ‘눈송이 스튜디오’였다. 독자와 만나는 자리였지만 독자들은 모두 줌 화면 속에 있었기 때문에 행사 내내 그 공간엔 나와 행사 진행자인 책방 매니저님, 한강 작가님, 그리고 한쪽 벽면의 빔프로젝터 화면에서 천천히 쏟아져 내리고 있던 눈송이들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그 눈송이들의 이미지 속에서 지냈던 건 그 눈들을 품은 공간이 한강으로부터 나온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 한강의 소설 속 한 장면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공간. 책방의 벽면 영상은 흰 눈송이들이 가득한 검은 하늘이 되었다가 겨울나무들이 줄지어 선 눈밭이 되었고, 다시 점점이 움직이는 흰 빛으로 채워졌다.

한강의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실린 단편소설 ‘어둠의 사육제’에는 세상의 끝으로 내몰린 두 인물이 나온다. 같이 상경해 지내던 고향 언니에게 전세금을 사기당한 영진은 서울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 베란다 방에서 기거하게 된다. 매일 밤 영진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어둠과 자신이 몸을 누인 베란다 아래로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잠이 든다. 그러다 맞은편 동에서 자신처럼 어둠과 불빛에 휩싸인 채 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명환을 대면하게 된다.

명환은 집이 없는 영진에게 자신의 집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명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명환이 홀가분하게 죽을 것임을 직감한 영진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며 피하지만, 그의 제안을 한사코 거부했다고 해서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 이 소설에서 명환은 죽는다.

‘어둠의 사육제’를 처음 읽은 습작기 때 이래로 한강은 내게 ‘어둠의 사육제’의 작가였고, 극한에 있는 인물들을 그릴 때면 종종 영진의 베란다방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신작을 낼 때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후에도 ‘어둠의 사육제’가 먼저 떠올랐던 건 이 초기 소설에 벼려져 있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감각 때문이었다.

나의 대답 한마디에 그의 삶과 죽음이 갈릴 수도 있다는 그 깊은 두려움. 주저하고 달아나려 하면서도 어째서 당신이 죽는 거냐고 묻는 마음. 삶에 대한 ‘모호한 미련들’과 ‘불분명한 용기’를 붙들고 불을 켜라고 외치는 목소리. ‘가장 지독한 어둠이 가장 확실한 새벽의 징후’임을 알면서도 그 새벽을 의심하는 마음들.

명환의 죽음을 겪은 영진을 쓴 이래로 어쩌면 그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아닌 다른 가능성을 찾아, 계속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최종 결과물인 책에는 쓰이지 못한 것을 나눈다는 것은 언어로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를 다루는 자로서, 누락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숱한 우회로를 거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작가노트 행사에서조차 전해진 것보단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의 존재 자체가 누구보다 작가들에게 필요했다는 걸 어쩌면 한강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책방 오늘’ 건물 앞에는 간판 대신 ‘내일도 새들이 노래할 거예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그것은 계속 쓰라는 주문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많은 작가에게 힘과 용기를 준 것처럼, 자신이 벼려온 자신만의 언어로 계속해서 저항하고 직시하고 사랑하라고. 그것은 그렇게 계속 쓰겠다는 기도문이다. 내일도 새들이, 노래할 테니까. 내일도, 새들이 노래할 테니까.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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