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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금)

[김교석의 남자의 물건] [1] 옷장에 마지막까지 남겨둬야 하는 한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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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치노팬츠

조선일보

1963년 8월 4일 요트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치노팬츠 차림의 케네디의 모습./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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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정치·경제 면에서 스타일 이슈를 접할 때가 있다. 이번 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의 낡은 야구 모자와 필드워치, 스티브 잡스의 시그니처 룩인 뉴발란스 992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부분 특정 아이템이 발휘하는 화학작용에 주목한다. 왜냐면 일반적인 미의 관점, 트렌드를 좇는 시선으로는 푸근한 할아버지와 깡마른 아저씨가 지닌 매력을 도저히 해석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멋의 도화선, 그러니까 누군가의 물건이 스타일이 되려면 자신의 지향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설득하며, 존재감을 각인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이 방면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존 F. 케네디다. 대통령 당선 전부터 흔한 말로 금수저 셀럽이었지만, 스스로는 늘 ‘선원’이라 여겼다고 한다. 실제로 15세 때부터 부모님이 선물해 주신 요트 빅추라(VICTURA)를 타고 매사추세츠주의 바닷가 기슭을 누볐고, 태평양 전쟁에서 드라마틱하게 생환한 해군 영웅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낸터킷섬에 별장을 짓고 틈틈이 요트를 타며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다스렸다.

그의 옷차림은 상류층의 기품을 지키면서 바다 사나이의 자유분방함이란 자신의 지향을 드러내는 데 탁월했다. 케네디는 당시 군수품인 치노팬츠를 상당히 즐겨 입는 대표적인 인사였다. 미군 장교 실내 근무복이었던 치노팬츠는 군대에 뿌리를 둔 태생답게 탄탄한 소재로 만들어져 각이 잡힐 뿐 아니라, 한여름만 제외하면 사계절 입을 수 있는 전천후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케네디가 입는 치노팬츠는 기존의 진짜 군복과는 많은 부분 달랐다. 그 시절 누구나 싸고 편해서 입는 군복 바지에 바다와 요트의 정서와 품위라는 자신의 지향을 가미했다. 몸에 딱 맞고 잘 다려진 치노팬츠 아래 맨발 차림으로 페니로퍼를 신거나 쨍한 원색의 양말과 보트슈즈를 신는 그만의 요트 패션은 당시 ‘낸터킷 패션’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바다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는’ 남자의 휴식을 이미지화한 셈이다. 그 이후 치노팬츠는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반소매 티셔츠부터 비즈니스 캐주얼까지, 밀리터리 애호가들부터 깔끔한 하객(賀客)룩 패션까지 광범위한 상황을 아우르며 남자의 옷장에 마지막까지 남겨둬야 하는 단 한 벌의 바지로 자리 잡았다. 군수품으로 시작한 면바지일 뿐인데. ‘어떤’ 남자의 물건이 갖는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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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석 푸른숲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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