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군 작은영화관.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는 날에는 영화관 앞에 전동 휠체어, 노인용 유모차, 시장바구니 등이 줄을 선다. 최상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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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사람들 만날 끼라꼬 얼굴에 쪼깨 찍어 바르고 왔어예.”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동동마을에 사는 임형자(85) 할머니는 지난달 25일 오전 9시30분께 한껏 달뜬 표정이었다. 임 할머니는 “영화관에 처음 왔어요. 노인대학에서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왔다기에, 나도 보고 싶어서 친구랑 함께 왔어요”라며 방글방글 웃었다. 함안군 산인면 갈전마을에 사는 이숙희(87) 할머니는 “마을 사람이랑 택시 대절해서 왔어요. 영화 보러 온다고 아침밥도 설쳤어요”라며 “앞에 택시 타고 먼저 출발한 두 사람이 자리 잡아놓고 기다린다 했는데, 빨리 들어가봐야 해요”라며 서둘러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이날 오전 9시께부터 함안군의 작은영화관엔 노인들이 삼삼오오 들어섰다. 지팡이를 짚거나, 노인용 유모차를 밀고 오는 이도 있었다. 대부분 할머니였고, 할아버지는 간혹 눈에 띄었다. 오전 9시50분쯤 되자 2개 관 합쳐서 96석인 영화관 좌석이 빈자리 없이 꽉 찼다. 10분 뒤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그리고 목련이 필때면’이 상영됐다.
2시간쯤 뒤 영화가 끝나고, 임 할머니의 얼굴은 눈물과 화장이 뒤섞여 얼룩덜룩했다. “육영수 여사가 총 맞아 죽는 걸 보다가 얼라처럼 울어삐가꼬 화장이 엉망이 됐어예. 그래도 영화를 보니까 참 좋네예. 다음에 또 오고 싶어예.” 함안군 가야읍 덕전동마을에서 온 조금자(79) 할머니는 “공짜로 재밌는 영화도 보고, 사람 구경도 실컷 하고 얼마나 좋아요. 우리 같은 노인네를 불러주니 참 고맙죠”라고 말했다.
경남도는 지난 7월부터 전국 시·도 가운데 처음으로 ‘어르신 영화관 나들이 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남해군 작은영화관에서 어르신들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경남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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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는 지난 7월부터 전국 시·도 가운데 처음으로 어르신 영화관 나들이 지원사업 ‘가는 날이 장날! 장 보고, 영화 보고!’를 시행하고 있다. 현재 경남 10개 군 가운데 함안군, 합천군 등 8곳에서 작은영화관이 운영 중이고, 함양군과 거창군은 내년에 문을 연다. 이 사업은 시골 지역 노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인기몰이 중이다. 일부 영화관은 올해 연말까지 예매가 완료됐을 정도다. 작은영화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관이 없는 지역의 문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지난해 말 기준 전국에 61곳이 있다.
경남도는 작은영화관과 5일장을 엮어서 어르신 영화관 나들이 지원사업을 기획했다. 5일장날 장 보러 읍내에 나왔다가, 나온 김에 영화까지 보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인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이다. 인구감소와 초고령화로 평소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시골이라도 닷새마다 서는 장터에는 사람들로 여전히 북적인다. 딱히 사려는 물건이 없어도, 그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나오는 사람도 많다. 물론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영화관은 평소 일반 관객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다가, 어르신 영화관 나들이 지원사업을 하는 날에는 어르신을 위한 별도 영화를 상영한다. 군·영화관·노인단체 등이 협의해 상영할 영화를 정한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육사오’ ‘정직한 후보’ ‘파일럿’ ‘하이재킹’ ‘아마존 활명수’ 등 우리 영화를 주로 상영한다. 자막을 읽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다.
최근 어르신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영화는 ‘소풍’이다. ‘소풍’은 올해 초 개봉한 김용균 감독의 작품으로, 경남 남해군을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김영옥·나문희·박근형 등 관객들과 비슷한 나이의 원로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지난달 25일 함안군 작은영화관에선 “지난번에는 소풍을 했다던데, 오늘은 왜 소풍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노인도 있었다.
작은영화관에서 어르신을 위한 영화를 상영할 때는 대관료를 경남도와 영화관이 절반씩 부담한다. 영화관 입장에선 입장료의 절반만 받고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지만, 관람석을 비워둔 채 상영하는 것보다 낫다. 게다가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보람도 있다. 기타 운영비는 경남도와 해당 군이 30%와 70%씩 부담한다. 당연히 어르신들은 공짜로 영화를 본다.
사업 운영은 해당 군이 맡아서 한다. 합천군은 57석 규모 1개 관을 운영한다. 합천군 5일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3·8장인데, 공휴일과 장날이 겹치는 날에는 열지 않고 평일 장날에만 오전 9시 영화를 상영한다. 합천군 담당자는 영화관과 협의해 상영할 영화를 정한 뒤, 다달이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보건소와 읍·면사무소 등에 게시한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합천군보건소나 합천군 담당 부서에서 나와 구강보건·우울증·심혈관질환 예방 등 건강교육이나 보이스피싱 예방 등 생활교육을 한다.
권도희 합천군 노인아동여성과 주무관은 “처음에는 관람객이 20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50명을 넘긴다. 한번 왔던 어르신이 또 오면서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 이렇게 해서 관람객이 계속 늘고 있다”며 “장 보러 오는 할머니 관객이 대부분인데, 장날 아침에 장 보러 읍내에 와서, 오전에는 영화 보고 교육받고, 오후에는 장터에서 식사하고 장 보고 귀가한다”고 말했다.
함안군 작은영화관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30분가량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노래와 춤을 가르치며 흥을 북돋우고, 함안군보건소도 막간을 이용해 치매예방 교육 등을 한다. 최상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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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군은 지역 상황에 맞게 조금씩 방식을 바꿔서 운영한다. 창녕군은 노인돌봄수행기관 2곳과 협의해서 운영하고 있다. 2곳을 이용하는 노인이 2400여명에 이르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 관람객을 모은다. 가능한 한 많은 노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처음 관람 신청한 노인부터 우선 배정한다. 영화 상영일은 애초 계획과 달리 장날을 피해서 정한다.
배재훈 창녕군 노인여성아동과 주무관은 “장터와 영화관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장 보러 온 어르신들이 영화관까지 이동하는 것이 불편하다. 장날을 피해서 영화를 상영했더니, 노인들이 모이는 날이 더 늘어났다”며 “영화를 보러 오는 날에는 어르신들이 나들이 가는 마음에 꽃단장을 하고 오신다. 정말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함안군 역시 장날을 피해 영화를 상영한다. 김민정 함안군 노인복지과 주무관은 “장날은 바빠서 영화 보러 오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어르신이 많아서, 영화관이 복잡해지는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함안군은 대한노인회 함안군지회에 맡겨 운영한다. 오전 10시부터 영화를 상영하는데, 영화 상영에 앞서 안정민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노래와 춤을 가르치며 분위기를 북돋운다. 함안군보건소도 막간을 이용해 치매예방 교육 등을 한다.
문효정 대한노인회 함안군지회 부장은 “왔다가 빈자리가 없어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자체적으로 입장권을 만들어서 나눠 주고 있다”며 “2개 관 합쳐서 96석을 운영하는데 항상 빈자리가 없이 꽉 차고, 11월 첫번째 상영분까지 매진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은형 경남도 노인정책과 주무관은 “아직 사업 초기이고 더운 여름에 시작했는데도 입소문이 나면서, 전체 관람객이 10월 말까지 5747명에 이르렀다. 또 갈수록 관람객이 늘고 있다”며 “올해는 8개 영화관이 20차례씩 영화를 상영하지만, 내년에는 경남 10개 군 모두 이 사업에 참여하며, 각 영화관마다 연간 52차례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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