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밤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 시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렸다. 10시 28분 ‘비상계엄’ 속보가 뜬 뒤 윤석열 대통령은 “종북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포고 직전 국무회의가 있었으나 요식행위에 불과해 절차적 정당성 논란이 일었다. 20여 분 뒤 여당인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계엄 선포는 잘못”이란 메시지를 내면서 정치적 명분도 잃었다.
차준홍 기자 |
11시부터 계엄 포고령이 발효되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국회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에 들어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본관 진입을 시도했다.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상정하고 1분 만에 가결했다. 4시 20분 윤 대통령은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10시간 뒤 야 6당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속속 드러나는 관련자들의 증언은 윤 대통령의 인식 세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걸 보여줬다. 6일 윤 대통령이 여인협 방첩사령관을 통해 우 의장과 한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한 대표가 대통령의 조속한 직무 정지를 요구한 배경이다.
무수히 제기된 대통령의 불통 성향은 참모들의 직언을 가로막았다. 강한 권력의 그립감에서 오는 도파민 중독은 대통령의 판단을 흐렸고, 주변은 예스맨들로 채워졌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여당 대표는 온갖 구실로 쫓아내려 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윤 대통령은 7일 대국민 담화에서 임기 등 정국 안정 방안을 당에 일임한다고 밝혔다. 이 말을 믿은 여당 지도부는 이날 대통령 1차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갔고 8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긴급 체포됐다.
10일엔 윤 대통령의 내란 혐의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이 통과됐다. 11일 경찰은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청장을 동시에 체포했다. 이들은 계엄 선포 3시간 전 윤 대통령을 만나 계엄 지시사항이 담긴 문건을 전달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무렵 윤 대통령은 “확 계엄해 버릴까” 같은 표현을 종종 써왔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임명 때부터 모의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급기야 윤 대통령은 12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며 “탄핵이든 수사든 맞서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피의자 변론을 보는 것과 같았다.
특히 이날 윤 대통령이 실토한 ‘부정선거론’에 대한 인식은 음모론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반지성적 사고를 의심케 했다. 담화 즉시 한 대표는 “사실상 내란 자백”이라며 탄핵 찬성 의사를 공표했다. 그러나 신임 원내대표로 친윤계인 권성동 의원이 선출되면서 계파 갈등은 고조됐다.
결국 윤 대통령에 대한 2차 탄핵안은 14일 오후 5시 가결됐다. 의원 300명 전원이 참석해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무효 각각 3·8표가 나왔다. 이어 열린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선 한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고, 선출직 최고위원 5명 모두 사퇴 의사를 밝혀 비상대책위 전환을 예고했다.
비상계엄부터 탄핵까지 열이틀간 축적의 시간이 남긴 것은 헌법 정신에 대한 성찰이다.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윤 대통령은 포고령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활동 금지, 언론·출판 통제, 위반자 처단 등 헌정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여기고 체포하려고 한 것은 법치주의에도 위배된다.
검찰총장 시절 그는 ‘법의 지배(rule of law)’란 표현을 종종 썼다. 공권력의 행사는 오직 국민이 합의한 원칙인 법에 의해서만 이뤄진다(존 로크)는 뜻이다. 반면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는 권력자가 법을 수단 삼아 시민을 통제한다는 의미다. 이를 막기 위해 삼권분립과 검찰·감사원 등 사정기관의 독립을 제도화 한 게(몽테스키외)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많은 국민이 대통령으로 그를 지지한 것은 지난 정권에서 성역 없는 수사로 법치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찰 없는 권력은 평소 독선적 성향과 맞물려 도파민 중독이 돼버렸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후안 린츠)이다. 그가 좋아한 하이에크의 경구처럼 지옥으로 가는 길은 늘 선의로 포장돼 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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