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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잡지 풍경소리가 통권 400호를 내고 넉 달간 죽었다가 부활해서 401호를 낸다. 종이에 인쇄된 서책이 아니라 화면(畫面)으로 읽는 전자책이다. 아담한 카페에 남녀노소가 끼리끼리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벽에 설치된 스크린의 풍경소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다. 한 늙은이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있고 젊은이들은 풍경소리보다 저희 수다에 더 바쁘다. 그래도 가끔 화면을 흘끗거리며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짓곤 한다. 대체로 가볍고 환한 분위기다. 조금도 무겁지 않다. …꿈에서 나오며 속으로 생각한다. 풍경소리 401호가 나오려면 2030년을 훌쩍 넘겨야 할 텐데 그때까지 우직(愚直)한 일부(一夫)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누가 귀에 대고 속삭여 말한다. 무슨 엉뚱한 소리? 풍경소리를 풍경이 내나? 괜한 걱정 마라. 소처럼 우직(牛直)한 사내는 죽지 않는다. 허공에 바다에 태양이 있는데 구름과 바람이 없을 수 있겠느냐? …카페에서 유난히 맑게 웃으며 깔깔거리던 연두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눈에 선하다. 음, 누가 뭐래도 밝은 것이 미래다.
이른바 귀농이라는 걸 하는데 마을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까탈을 부려 문도 열지 못하겠다. 그들이 내거는 엉터리없는 이유에 어이도 없고 화도 나고 해서 속으로 이런 마을 돈 주며 살라고 해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데 집사람이, 전에처럼 정향도 효선도 아닌 낯익은 여인이, 해바라기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젊은이들을 설득시켜 귀농을 성사시키려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은근 감탄스럽긴 하다. 그러다가 돌연 분위기가 바뀌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기세등등하던 젊은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선다. 퇴계 이황(李滉)과 동명이인이라는 영감이 여러 장정을 거느리고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거꾸로 바꿔놓는데 돌아가는 모양새가 그냥 귀농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을 촌장으로 추대될 것 같다. 아무리 꿈이지만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단 말인가, 고개 젓다가 꿈에서 나온다. …누가 웃는다, 황당하기로야 이 나라 정치판만 한 데가 또 있을까? 어쩌면 저토록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으며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대꾸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 얼굴에 침 뱉는 것이 제 얼굴에 침 뱉는 것임을 몰라서 저러는 건데, 어쩔 것인가? 그저 짠한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젊은 기자와 논설 같은 말을 주고받다가 다음 한 마디를 무슨 엄청난 결론처럼(?) 내지른다. “그러니까 자네의 ‘통일조선민족일보’가 그 대단한 영향력으로 국회의원 몇을 움직여 ‘부정청탁영구퇴치특별법’을 만들라는 말일세. 그것도 못하면 그게 매스컴인가?” 기자가 비웃듯 입꼬리를 뒤틀며 뭐라고 웅얼거렸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꿈에서 나오니 그나마 대화가 중도에서 흐지부지된 게 다행이지, 싶다. 현실 같았으면 그런 말을 내지르기는커녕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 갈 길이 멀다. 비몽사몽으로 누가 속삭이듯 묻는다. “기자는 본인의 기사에 영향을 받는가?” 답한다, “물론! 어떤 기사의 영향을 누가 받는다면 그것을 쓴 기자가 맨 먼저일 거다.” 꿈에서 나와 오줌 누며 생각한다. 그렇다, 기사와 기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이다.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결국 제가 만드는 세상에서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반응하며 살고 있는 거다. 한 인간과 그의 인생이 나뉠 수 없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시험지에 생각나는 대로 답을 쓰다가 다음 문장의 ( )를 채우라는 문제에서 주춤한다. “나는 ( )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한 친구는 (통일)을 위해, 다른 친구는 (조국)을 위해, 라고 쓰는 것 같다. 뭐라고 쓸 것인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근사하지만 아니다. 무엇이 아버지 뜻인지 어떻게 알고 그것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단 말인가? 끝내 ( )를 채우지 못한 채 꿈에서 나온다. 저녁에 차를 좀 마셨더니 오줌보가 터질 것 같다. 잠시 앉았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다. 이어진 꿈에서 다음 문장을 읽었는지 썼는지 모르겠다. “너는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마땅히 네 생명을 바쳐야 한다.” 영문(英文)으로 된 강경한 문장이다. 비슷하게 단호한 어조로 대꾸한다. “그럴 수 없다. 나에게는 하느님을 위해서 바칠 생명이 없다. 내가 생명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생명이 나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 또한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존재가 따로 없는 아들이다.” …여기까지다. 깨고 보니 꿈에 생각을 한 건지 생각이 꿈에 저를 말해준 건지 모르겠다. 아무러면 어떤가? 중요한 건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실현되는 생각이다. 몸으로 “실현하는” 생각이 아니다. 몸으로 “실현되는” 생각이다.
이현주 목사의 꿈 일기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마을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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