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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금)

    이슈 미술의 세계

    광주 휘감은 저항과 해방의 에너지…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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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학철 회고전 ‘시대의 몽타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일부분.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항쟁의 희생자 김주열의 주검과 광주 항쟁의 시민군 주검들이 민중을 배경으로 들불처럼 위로 솟구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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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처럼 타오른다. 섬광처럼 번득인다. 회오리바람처럼 피어오른다.



    이 땅의 민중이 지난 100여년간 내뿜었던 저항과 해방의 에너지를 리얼리즘 미술의 거장 신학철(81)은 이렇게 묘사해냈다. 권력의 압제에 맞서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내디뎌온 역사를 작가는 지난 40여년간 장대한 화폭에 극사실적인 포토리얼리즘의 시선을 깔고 핍진한 필치로 재구성하고 채색해 배열했다. 한국 리얼리즘과 민중미술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념비로 남게 된 1980년대의 ‘한국근대사’ 연작과 90년대의 ‘한국현대사’ 연작, 그리고 서정성과 역사 의식이 녹아 흐르는 1998~2002년의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다.



    내란 수괴 윤석열의 계엄 책동으로 비롯된 12월 항쟁의 달을 지나 을사년 뱀의 해를 맞는 지금, 광주 운암동 광주시립미술관 제1·2전시실에서는 장강대하와도 같은 신학철 역사화의 비경이 1층과 2층을 굽이굽이 돌며 펼쳐지고 있다. 12월17일 시작한 민주인권평화전 ‘신학철―시대의 몽타주, 60년 회고전’이다. 한국근현대사 연작과 80년대 이적 표현물로 압수당한 ‘모내기’의 작가로 유명한 민중미술 거장 신학철의 60년 화력을 총정리한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한겨레

    작가가 전위 실험미술에 심취했던 청년 시절 만든 ‘닭발’(1970)의 일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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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아방가르드협회(에이지 그룹)의 회원 작가로서 실과 일상용품 등을 결합해 벌인 모더니즘적 매체 작업부터 80년대 민중미술, 21세기 박근혜 촛불 탄핵 역사화까지 방대한 예술세계를 90여점의 작품으로 총정리한 전례 없는 기획이다. 실험미술, 몽타주 콜라주, 포토리얼리즘 등을 활용해 민중의 삶과 역사를 조명하는 작품들과, 일본 간토 대지진,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현실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 대작들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전시는 ‘해체와 재구성의 신체 몽타주’, ‘망각된 역사의 소환’, ‘시대를 위한 기념비’ 등 세 섹션으로 나누어 시대순으로 구성했다. 우선 ‘해체와 재구성의 신체 몽타주’에는 한국 전위 미술의 영향 아래 엄혹한 사회 현실의 비판을 고뇌했던 ‘비상탈출’ 같은 작가의 초기작들이 나온다.



    한겨레

    미기증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 있는 ‘한국근대사-분단상황’(1993)의 일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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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도 전시의 아퀴를 짓는 핵심 작품은 2부 ‘망각된 역사의 소환’의 10점 넘는 한국근현대사 연작들과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다. 작가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나와 촌놈들의 이야기’라고 겸손하게 밝힌 이 그림은 실제로는 해방 이후 4월 혁명, 5월 박정희 군사정변,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사 사건들이 화염이나 들불처럼 타오르거나 번져가는 이미지 속에 주된 축선을 이룬다.



    이런 대작들 사이사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담은 희생자의 으깨어진 얼굴을 클로즈업한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1990) 같은 개별 사건의 면면을 담은 작품들도 함께 배치되어 신학철 역사화 작업의 흐름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게 된다. 리움에서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작품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키스하는 남남북녀의 모습을 가장 위에 배치하고 그 아래로 외세와 군사독재자, 재벌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썩어문드러진 현대 한반도의 질곡 상황을 적나라하게 풀어낸 ‘한국근대사―종합’(1983)도 볼 때마다 선연하게 인상을 아로새기는 명작이다.



    한겨레

    처연한 서정미가 돋보이는 ‘할미꽃’(1995)의 세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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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강처럼 흐른 민초들의 아우성과 지배집단의 치부, 이를 후원한 미국과 지배집단의 앞잡이가 된 독점자본의 모습 등이 포르노에서 끌어온 남녀의 알몸과 기계, 무기, 일상 사물의 팝적인 이미지 등과 뒤엉킨 역사화들은 스펙터클하고 장엄하면서도 처절하게 아름답다. 여성 미술계 일각에선 남근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남성적이고 억센 기운이 넘치는 신학철 역사화의 여러 유형들을 곱씹어보면, 그가 항상 눈 치켜뜨며 20세기 한국사의 흐름을 죽음으로 대변되는 소멸과 새로운 생성이란 틀 안에서 형상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층 모더니즘 시대의 초반부 매듭 작업부터 60년대 중후반부 자화상과 동료 작가들과의 작업 장면 등을 그린 1·2층 통로 부분의 영상과 슬라이드 등을 보면, 작업 태반은 지금 모더니즘 단색조회화 진영의 작가들처럼 뜬금없이 튀어나오고 진행된 것이 아니라, 80년대 기본적인 작업과 조형성의 틀이 이미 정립됐고 이후 이를 확장하고 변주하고 심화시켜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됐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다.



    한겨레

    지난 20일 자신의 전시 개막 행사가 열린 광주시립미술관 1전시실에 나온 신학철 작가. 자신의 대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 앞에서 손짓을 하며 설명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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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시대를 위한 기념비’로 명명된 2층 전시 영역은 좀 더 차분한 구도로 민초의 무덤가에 핀 할미꽃과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노동자의 강고한 면모를 담은 그림들과 더불어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대학살 장면을 담은 지난해 그의 근작들을 내놓았다.



    지난 20일 개막 행사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아직도 이것밖에 못 내놓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많이 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길이 40m, 높이 2m40㎝에 달하는 새로운 ‘갑순이와 갑돌이’ 두번째 연작의 새 작업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지금껏 작업해온 20세기 민중의 역사에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와 지금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며 응원봉을 치켜든 빛의 시위까지 담은 장대한 그림 기록지를 준비할 것이라고 진중한 말투로 털어놓았다. 3월30일까지.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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