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김오랑 (1944~1979)
김오랑의 고향은 김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베트남 전쟁에 다녀온 뒤 특전사에서 근무했다. 1979년 3월에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비서실장이 됐다. 12월12일,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이 정병주를 체포하러 왔을 때, 김오랑 소령은 권총을 들고 맞섰다. 가슴과 배에 소총 여섯발을 맞고 12월13일 새벽에 숨졌다.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백영옥은 간호학과 학생이었다. 월남전 때 김오랑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972년 12월,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1979년 12월12일 밤에 백영옥은 특전사 관사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이튿날에 시댁 식구로부터 김오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 때문이었을까, 백영옥은 1980년에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부하들은 사건을 덮고 싶었다. 김오랑의 주검을 특전사 뒷산에 서둘러 묻었다가 이듬해에야 현충원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순직’이라고만 적게 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 김오랑의 죽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88년 국회 청문회 때 정호용은 김오랑이 “명예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했고, 1990년에 국방부는 김오랑을 중령으로 추서했다.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소송을 걸기로 결심. 그 뒤로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세상을 힘들게 산다”는 둥,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둥,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연락에 시달렸다. 1991년에 백영옥은 소송을 포기. 전두환 쪽 사람들은 위로금을 건넸다. 얼마 뒤 백영옥은 베란다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의문의 죽음.
전두환은 1995년에 체포됐다.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았다. 전두환의 여러 죄목 중 하나가 ‘내란목적살인’.
목숨을 빼앗긴 사람 가운데 김오랑이 있었다. 2009년 특전사에 김오랑 추모비가 섰다. 훈장도 추서. 2022년과 2023년에 ‘순직’ 대신 ‘전사’로 공식 기록이 바로잡혔다. 2025년에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이 일부 인정되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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