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영화배우 문예봉과 극작가 임선규 부부의 화려한 변신
일러스트=한상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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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홍도야 울지 마라’·1939) 지금도 널리 애창하는 이 노래는 1936년 동양극장에서 초연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1939년 영화화될 때 삽입된 주제곡이었다.
홍도는 오빠 철수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생이 된다. 그러다 오빠의 친구 영호와 사랑에 빠지고, 영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얼마 후 영호는 유학을 떠나고, 홀로 남은 홍도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계략으로 시집에서 쫓겨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영호는 부잣집 딸과 약혼하고, 남편의 약혼식장으로 달려간 홍도는 남편의 약혼녀를 칼로 찌른다. 홍도를 체포하러 사건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은 다름 아닌 홍도의 오빠 철수. ‘운명의 장난’을 슬퍼하면서 철수는 누이 손에 수갑을 채운다.
이 연극을 보려고 줄을 선 인파로 동양극장은 초만원이었고, 공연이 끝날 때마다 홍도의 불행에 감정이입 한 관객들의 울음으로 극장 안팎은 눈물바다였다. ‘최루성 신파극’의 최고봉으로 꼽기에 손색없는 이 연극의 성공으로 당대 최고 은막 스타 문예봉의 베일에 싸인 남편 임선규는 혜성같이 등장해 최고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친일영화 '지원병'(1941)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문예봉(왼쪽) /KM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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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은 1917년 함흥에서 배우 겸 극단주 문수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학교 다닐 나이에 아버지의 강요로 여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문예봉은 15세 때 문수일의 동년배 친구 나운규의 제안으로 무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출연했다. 영화의 대성공으로 문예봉은 일약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해 16세 문예봉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은 극단에서 일하는 다섯 살 연상 무명 작가 임선규와 결혼했다. 문예봉은 가난한 데다 폐병까지 있는 임선규를 간병하면서 2남 2녀를 낳아 길렀고, 생계를 위해 영화 수십 편에 출연했다. 문예봉은 방에 혼자 남은 아이를 줄에 묶어 놓거나 아이를 업고 촬영장에 출근했다.
하지만 문예봉‧임선규 부부는 모범적이었던 사생활과 달리 태평양전쟁 기간 나란히 친일 예술 활동에 앞장서서 역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임선규는 1942년 제1회 ‘국민연극 경연 대회’에서 공연된 ‘빙화’의 대본을 썼고, 조선 최초의 지원병 주제극이었던 ‘동백꽃 피는 마을’(1942), 일본의 적국인 미국과 소련에 대한 적개심 앙양을 목적으로 한 국민 연극 ‘새벽길’(1945) 등을 창작해 무대에 올렸다. 문예봉은 1938년 일본 군용 열차를 폭파하려는 중국 스파이 일당을 일망타진한 조선인 기관사의 활약상을 그린 ‘군용 열차’(1938)를 시작으로 ‘그대와 나’(1941) ‘집 없는 천사’(1941) ‘조선해협’(1943) ‘태양의 아이들’(1944) 등 다수의 친일 영화에 ‘거액 출연료’를 받고 출연했다.
조선일보 1940년 2월 28일자에 실린 배우 문예봉을 그린 안석영의 삽화. 문예봉을 '대비양(大鼻孃, 큰 코 아가씨)이라고 표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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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문예봉‧임선규 부부는 신불출, 조영출, 최승희 등 태평양전쟁 기간 친일에 앞장섰던 인기 예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익 진영에 투신했다. 1946년 8월, 문예봉은 여성 영화인으로서 유일하게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1월, 임선규는 남로당 창당 대회에서 선동극 ‘긴급 동의’를 무대에 올렸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전 문예봉‧임선규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김일성‧김정숙 부부는 문예봉이 일하게 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를 몸소 찾아 문예봉의 월북을 치하했다.
월북 배우 문예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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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문예봉은 영화 잡지에 나운규를 “천재적 예술가이며 정열적 인간”으로 기술한 글을 실었다가 ‘반혁명 반동’으로 몰려 안주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 북한에서 ‘천재’라는 말은 김일성‧김정일 부자 말고는 누구에게도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월북 후 임선규는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당 방침에 부합하는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 문예봉과 별거 상태로 결핵 환자 요양소에서 격리돼 지내다가 196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예봉은 1980년 김일성의 지시로 복권돼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복귀했다.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맞아 ‘인민배우’ 칭호와 ‘국가 훈장 제1급’을 받았다.
문예봉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을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만났다. 임수경이 판문점으로 귀환하기를 고집하며 북측 판문각에서 6일 동안 단식에 들어갔을 때, 문예봉은 평양 시민 대표단 27명과 함께 판문각을 찾아 임수경을 위문했다.
정원식총리(오른쪽 두번째)가 남북고위급회담 첫날회의를 마친 1991년 10월 23일 북의 연형묵총리(오른쪽) 안내로 조선영화촬영소를 방문, 인민배우 문예봉(왼쪽)씨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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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제4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해 방북한 정원식 총리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방문해 74세 문예봉에게 “아직도 현역이시군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문예봉은 “내 평생 절절한 소원은 남조선 동포와 함께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모시고 통일의 광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다”고 말했다. 정원식 총리가 “통일을 위해 내가 이곳에 왔다”고 답변하자, 문예봉은 “남한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학생들을 쇠망치로 때리고 임수경을 가뒀으며, 국방장관은 특공대를 보내 북을 치겠다 한다”(‘조선일보’ 1991.10.24.)고 항의했다.
<참고 문헌>
박현희, ‘문예봉과 김신재’, 선인, 2008
전지니, ‘인민 여배우의 탄생’, 여성문학연구 제43호, 2018
주창규, ‘문예봉, 발명된 국민 여배우의 계보학’, 영화연구 제46호, 2010
한상언, ‘문예봉전’, 한상언영화연구소, 2019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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