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 의대생 복귀 시한이 속속 도래하고 있다. 얼마 전 수도권 의대에 다니는 자녀를 둔 중앙부처 공무원을 만나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됐다. 자녀가 복귀를 고민하고 있는데 "족보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족보는 각 의대의 10여년 치 기출문제와 수업 핵심 내용을 담은 자료를 뜻한다. '문제 유출이다, 아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쪽지 시험마저 시험 범위가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의대생에게 족보는 필수 아이템이 된 지 오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족보는 의대 학생회에서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학생회가 '휴학생 복귀'에 부정적인 상황에서 무턱대고 학교에 복귀했다가는 '족보 왕따 학생'이 돼 학교생활과 학점 관리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년 넘게 이어진 의대 교육 정상화를 가를 마지막 한 주가 시작됐지만 복귀할 생각을 가진 의대생들 입장에서 보면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복귀 이후가 막막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족보'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시험에 대비한 요점정리 노트인 만큼 '족보에만 매달려 의사가 된 사람이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있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복귀하더라도 족보를 손에 쥔 학생회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의대생들의 현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서울 소재 한 대학 의대 태스크포스(TF)가 '수업 거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족보 공유를 제한하겠다'라며 학생들에게 수업 거부를 강요해 경찰 수사까지 받은 게 불과 1년 전이다. 이들의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선 '일단 등록해 제적을 피하고 수업을 거부해 추후에라도 족보 혜택을 보겠다'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고 한다. '족보'가 학생회의 비민주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된 셈이다.
지금 의대생들 분위기로는 수업 복귀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 '족보' 문제뿐 아니라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일부 의대에서는 수업 시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을 바꾸는 등의 보호 지침까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기회에 각 의대가 학습 지원 자료를 제공하는 '의대교육지원센터'를 공식화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의대생을 더 자극할 수도 있고 정부가 나서 족보까지 챙긴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으나 의대교육 정상화 기로에 선 상황에서 굳이 피할 선택지는 아니다. 중장기적으로는 고충과 진로 상담 등 다른 교육 기능까지 부여해 제대로 된 지원 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의대가 있는 대학들은 "미등록 학생은 절차대로 처리"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 역시 일관성 유지가 중요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버티면 학교가 또 휴학을 묵인해 주지 않겠느냐'라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부나 의대가 의대생을 특권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