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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6 (금)

    “한국 시민들 내란 극복하는 걸 보며 무기력증 떨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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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제주4·3평화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지난 29일 제주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4·3평화상 수상자 기자회견에서 말하고 있다. 허호준 선임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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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자나무의 이파리들은 계속 성장하면서 자라납니다. (부채 모양의) 오래된 이파리들 위에 새 이파리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을 보면서 과거의 이파리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새로 얻은 이파리들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지난 28일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맞닥뜨린 야자나무를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제주4·3평화상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그는 “켜켜이 쌓여온 이파리들이 기억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기억은 안타깝지만 고통에 의해 잘 전달되고 있다”며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악을 목도했을 때 혼자서 외롭게 맞서지 않고 시민의 힘으로 맞서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기자 출신인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목격자들’, ‘아연 소년들’,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같은 작품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겪은 여성, 어린이, 군인, 전사자 가족의 증언을 기록해왔다. 역사와 문학, 저널리즘의 경계를 허문 ‘목소리 소설’이라는 고유한 글쓰기를 개척한 작가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푸틴 영향력과 전쟁 뉴스에
    “악이 지배하는 듯한 최면에 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졌지만”



    12·3 맞선 시민들 보며 희망 느껴





    29일 제주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4·3평화상 수상자 기자회견에서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힘을 합쳐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는 걸 보면, 저도 ‘악이 총제적으로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최면에 자꾸 걸린다”며 악에 압도된 듯한 민주주의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공격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고향 벨라루스의 신문을 매일 읽으며 ‘민주주의는 사실은 저항할 힘도 없는 것이었구나’ 하는 무기력함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시민의 힘으로 12·3 내란사태를 극복한 한국을 보며 “민주주의에는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고 했다. “지금 우리를 붙잡을 것은 시민 저항과 그것을 공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한국 사회가 너무나도 탁월하게 전세계에 보여줬습니다.”



    한겨레

    제주4·3평화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지난 29일 제주시내 한 호텔에서 연설하고 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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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극우세력이 선동하는 폭력과 혐오가 넘치는 시대지만 작가는 “악을 마주하고 너무나도 빨리 뒷걸음질 치면서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일한 돌파구로는 “공포심 앞에 이리저리 놀라서 움직이는 군중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서) 조금 떨어져 판단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를 권했다.



    악에 적응하지 않는 일상의 실천도 강조했다. 2020년 독재정권에 맞선 벨라루스 시민 혁명 때 그는 일흔살 넘은 나이로 민주화 시위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티브이(TV)를 켜고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며 ‘오늘도 러시아군 폭격이 있어서 19명이 사망했고 그중 5명은 어린이’라는 뉴스를 본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있는 인격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건 아니지’하는 저항의 정신을 떠올려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저항은 외부만이 아닌 내부로도 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제는 끔찍한 소식을 들으며 끔찍해 했던 내가 오늘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끔찍해 하지 않는다면 벌써 적응이 된 건데요. 나 자신을 보존하려는 저항도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에 저항의 힘 있다는 사실
    한국 사회가 전세계에 잘 보여줘”
    악에 적응하지 않는 저항·실천 강조





    한편, 평생 시민의 저항을 강조해온 작가는 한국의 해방공간에서 불의에 저항하다 4·3사건으로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2019년 처음 방한했을 때 한국의 한 작가가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혀 고통받았던 ‘붉은 섬’ 제주에 대해 알려줬다고 한다. “제주도는 적극적 저항의 정신을 가진 신화의 섬입니다. 오늘날 이런 적극적인 저항 정신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작가로서 그것을 어떻게 더 발전시키고, 영악한 악에 맞설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제주에 왔습니다.”



    이날 제주4·3평화상을 받은 작가는 30일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1일에는 제주문학관에서 북토크를 열어 도민과 만난다.



    서보미 허호준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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