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한화오션 거제 사업장에서 장보고‑Ⅲ 배치(Batch)‑Ⅱ 1번함 장영실함 진수식이 열리고 있다. 해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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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진수식을 마친 첫 3600t급 해군 잠수함인 장영실함은 이전과 다른 이름이 눈길을 끈다. 장영실은 천문관측기계 혼천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꼽힌다. 잠수함 이름에 과학기술자가 들어간 것은 장영실함이 처음이다.
해군은 함정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는다. 해군 전력발전업무 규정에는 함정마다 함명 제정 기준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은 ‘독립운동 공헌 인물 및 광복 후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잠수함 건조사업은 1~3차로 나눠 진행 중인데, 2·3차 사업 부터 잠수함 이름은 거의 독립운동가에서 따왔다.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유관순, 홍범도, 이범석, 신돌석, 안창호, 안무, 신채호함이 등장한 이유다.
잠수함과 독립운동가는 은밀성이란 공통점이 있다. 잠수함은 어둡고 차가운 깊은 바다를 은밀하게 항해한다. 일제하 독립운동가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만주 벌판 등에서 은밀하게 활동했다. 군수 물자가 부족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와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립을 향한 굳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잠수함 승조원들도 독립운동가들의 기개를 본받아 최고의 전투태세를 완비해야 한다고 장병들을 교육하고 있다.
해군은 지난해 10월 장병과 군무원 877명을 대상으로 첫 번째 3600t급 잠수함 이름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부승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해군에서 받은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일제강점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열사(득표율 32.8%)를 꼽은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광복군 총사령관 지정천 장군(8.8%), 항일시인 이육사(8.7%) 순이었다. 1932년 일본 도코 한복판에서 일본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열사의 의거와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다 적대 세력의 코앞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같은 강력한 한 방을 날려 전세를 바꾸는 핵심전략자산인 잠수함 이미지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군이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과 잠수함 현황을 설명한 자료. 해군 누리집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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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설문 조사 결과와 달리 해군은 지난 22일 진수식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인으로 평가되는 장영실을 함명으로 제정했다. 선도함(3600t급 잠수함 중 첫번째 함정)의 독자적 국방기술의 집약체인 잠수함의 상징성과 케이(K)-방산 수출의 효과를 고려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진수식에서 해군과 방위사업청은 “장영실함은 국내 기술로 생산한 장비 탑재를 확대했다. 이는 잠수함의 안정적인 운용에 도움이 되고, '케이(K)-방산'의 기술력 구축과 수출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해군은 지난 7월31일 함명제정위원회를 열어,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을 바꿨다. 기존 ‘독립운동 공헌 인물 및 광복 후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에서 ‘군사력·해양력·과학기술 발전 및 외세항쟁·독립운동 등에 기여하여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확대했다. 해군은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을 바꾼 당일 첫 번째 3600t급 해군 잠수함 이름을 장영실함으로 선정했다.
해군은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을 변경한 사실을 지난 22일 진수식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 2023년 잠수함 홍범도함 개명 논란을 감안하면, 해군이 함명 제정 기준 변경을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처리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 변경의 실효성도 논란이다. 함명제정 기준 변경이 해군참모총장 결재만 났고 해군 법무실의 심사를 거쳐 규정이 발령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해군은 참모총장 결재가 있으면 규정을 명문화하지 않더라도 시행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부승찬 의원은 “국민과 장병의 공감과 자부심을 높이겠다며 잠수함명 선호도를 조사해 놓고 정작 그 결과를 덮었다면, 그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며 “해군이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결정에 이른 배경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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