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에서 72살 발렌티나 베스퍄토바가 러시아 공습으로 파괴된 자기 집 앞에 서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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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앞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군이 연일 상대방의 에너지·발전 시설을 폭격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정전을 유도해 항전 의지를 꺾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연료 공급과 원유 수출을 방해하려 한다.
르몽드와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는 2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지난 1일 밤∼2일 새벽 러시아 서부 흑해 인근 크라스노다르의 투압세 석유 운송항만과 정유 시설을 드론(무인기) 등으로 공격했다고 밝혔다. 부두와 정박 중인 유조선에서 불길이 번지는 영상이 사회관계망 등에 퍼졌다.
우크라이나 매체 수스필네는 우크라이나 보안국 관계자를 인용해 “이번 공격으로 유조선 1척에 화재가 발생했고, 부두 4곳이 가동 불능이 됐으며 항만 내 여러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크라스노다르 지방 정부 역시 드론 파편이 유조선과 석유 항만을 손상시키고 화재를 유발했다고 인정했다. 당국은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유조선 갑판 상부 구조물이 손상됐다. 선원들은 모두 대피했으며, 선박 내부에서도 화재가 생겼다”고 밝혔다. 투압세 남쪽 소치 공항 역시 2일 한때 항공기 이착륙을 중단했다.
투압세는 러시아가 중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튀르키예 등으로 석유를 수출하는 항구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공격 당시 투압세 항구에 러시아 ‘그림자 선단’ 소속 유조선이 최소 3척 정박해 있었으며, 러시아산 원유의 약 20%가 이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림자 선단은 러시아가 각국의 선박 운송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운영하는 최대 1000여척의 배다.
우크라이나군은 또 1∼2일 리페츠크 주 등 러시아 서부 5곳의 변전소를 타격했다고 밝혔다. 쿠르스크·리페츠크주 변전소와 오룔주 발전소에서는 화재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휘발유·경유 등의 정유 시설도 우크라이나군의 주된 타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최근 “우크라이나 장거리 타격이 러시아 내 정유 시설 20%를 무력화했다. 이는 서방 정부들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석유 시설과 유조선을 때리는 건 러시아의 전쟁 ‘돈줄’을 끊기 위해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러시아가 유령 유조선을 통한 석유 수출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자금의 40%를 얻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전쟁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우크라의 장기 공습으로 러시아의 석유 및 가솔린 시장이 지속적으로 악화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장기 자금 조달 능력에 영향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러시아군 역시 상대 에너지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노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부 자포리자주 당국은 러시아군이 1일 밤부터 이날 새벽까지 이 지역에 드론·미사일 공습을 가해, 한때 5만8000명이 정전을 겪고 시민 2명(44살 여성, 91살 남성)이 다쳤다고 밝혔다. 전력복구반이 즉시 송전망 복구에 나섰지만 이날까지 1만1400명 이상이 정전 상태였다. 앞서 지난달 22일엔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히우가 러시아군의 대규모 드론 공습을 받아 수십만명이 정전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전력·난방이 끊긴 채 추운 겨울을 맞게 해 항전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 싱크탱크 라주므코프센터의 에너지 전문가 볼로디미르 오멜첸코는 르몽드에 “이번 가을 러시아의 공습 목표는 (우크라이나 중부를 흐르는) 드니프로강을 기준으로 국가 전력망을 두동강 내는 것이다. 국가 동쪽 절반을 어둠과 추위에 빠트리려는 것”이라며 “러시아는 드니프로강 우안(서쪽) 지역 원자로 9기에서 생산된 전력이 좌안(동쪽)으로 송전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 한다”고 짚었다.
이어 이런 정전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타격보다는 여론의 동요를 일으킨다고 분석했다. 그는 “러시아는 내년 1월이면 우크라이나 국민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위기를 맞게 하려 한다. 이를 통해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러시아의 값싼 가스와 전력을 (이전처럼) 받는 대가로 항복하라’고 압박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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