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여왕개미(왼쪽 검은색)와 딸들인 일개미의 공격을 받는 여왕개미(오른쪽). 일개미들은 기생 개미가 뿌린 악취에 여왕을 외부 침입자로 오인한다./Current Bi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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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는 모두 한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여왕개미가 알을 낳으면 딸들인 일개미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같은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준다. 기생 개미가 들어오면 개미 사회의 평화가 한순간에 깨진다. 일개미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밖에서 들어온 가짜 여왕을 모신다. 미국 HBO방송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처럼 권좌를 얻기 위한 비열한 모략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다.
다카스카 케이조(Keizo Takasuka) 일본 규슈대 생물학과 교수 연구진은 “기생 개미 여왕이 침입해 일개미들을 속여 진짜 여왕을 죽이는 모친 살해(matricide) 현장을 목격했다”고 지난 17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발표했다. 나중에 일개미들은 왕좌를 찬탈한 기생 여왕을 섬겼다.
◇개미의 화학신호 해킹해 왕좌 찬탈
일본에서 흔히 ‘악취 개미’로 불리는 동양털개미(Lasius orientalis)와 황털개미(Lasius umbratus )는 각각 황개미(Lasius flavus)와 일본풀개미(Lasius japonicus) 개미 집단에 은밀히 침투하는 기생 개미이다. 개미는 신호 호르몬인 페로몬을 분비해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지만, 기생 개미를 구별하지 못한다. 다카스카 교수는 “기생 여왕개미는 군락에 침투하기 전에 밖에 돌아다니는 숙주 개미들이 분비하는 페로몬을 자기 몸에 묻혀 적군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기생 개미는 일개미들에게 동료로 인정받으면 본격적인 왕좌 찬탈에 들어간다. 기생 개미가 여왕을 찾아내면 개미산으로 추정되는 악취 화학물질을 뿌린다. 다카스카 교수는 “기생 개미는 여왕의 정상적인 냄새를 역겨운 냄새로 위장함으로써, 개미들이 냄새를 인식하는 능력을 악용한다”며 “평소 여왕을 보호하던 딸들인 일개미가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한다”고 설명했다.
기생 개미는 범죄 현장에서 잠시 몸을 피한다. 개미산에 노출되면 자신도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 개미는 일개미들이 여왕을 죽이고 사체를 처리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돌아와 여왕에게 악취 물질을 여러 번 분사한다. 모친 살해 현장이 정리되면 기생 여왕개미가 돌아와 알을 낳기 시작한다. 일개미들은 모친 살해를 사주한 기생 개미와 그 자손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이번 논문 제목은 ‘기생 개미 여왕이 화학적 유도로 일개미에게 모친 살해 행위를 유발한다’이다. 다카스카 교수는 “처음에는 논문 제목을 딸이 속아 어머니를 죽이는 우화처럼 만들고 싶어 챗GPT에 물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며 “이번 결과는 자연이 우리가 소설에서 본 것 이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미국 록펠러대 생물학과의 대니엘 크로나우어(Daniel Kronauer) 교수는 뉴욕타임스지에 “마치 ‘왕좌의 게임’ 속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크로나우어 교수는 개미들이 후각으로 의사소통하는 과정을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한 과학자로 개미 집단에 가짜 여왕개미가 생기는 변이 과정도 밝혔다.
모친 살해 과정. (A)기생 여왕개미(왼쪽)가 숙주 여왕개미에게 접근해 접촉을 시도한다. (B)기생 개미가 악취 물질을 여러 차례 분사하자 숙주 여왕이 일개미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C) 기생 개미는 일개미들의 공격을 받는 숙주 여왕에게 악취가 나는 액체를 반복해 분사하고 도망간다. (D) 숙주 여왕이 일개미들에게 허리가 잘린 모습. (E~G) 숙주 여왕개미가 기생 개미가 복부에서 분비한 악취 물질을 맞고 일개미들의 공격을 받는 모습의 동영상 캡처 화면들./Current bi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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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공 피하려 나서지 않고 반역 유발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거나 잡아먹는 모친 살해는 드물기는 하지만 자연에서도 나타난다. 일부 거미 종에서는 새끼 거미들이 어미 거미 몸을 먹고 자란다. 언뜻 보기에 비정상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리려는 본능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번 개미는 다르다. 다카스카 교수는 “이번 모친 살해 사례에서는 어미나 자손 어느 쪽도 이익을 보지 못하고 오직 기생하는 제삼자만 이익을 얻는다”고 말했다.
군집 고유의 냄새 정보를 해킹해 다른 개미 집단에 침투하는 기생 개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개미 1만5000여 종(種) 중 400여 종이 기생 개미로 알려졌다. 대부분 다른 종의 집에 몰래 들어가 기생한다. 과학자들은 수천 년에 걸쳐 특정 개미 종에 기생하는 개미들이 진화했다고 본다.
보통 기생 여왕개미는 다른 개미 군집에 침입한 후 직접 여왕개미를 죽이고 일개미들을 설득해 자신을 섬기게 한다.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일개미들의 모친 살해 행동을 유발하는 과정은 이번에 처음 관찰됐다. 그렇다면 왜 기생 여왕개미는 간단하게 숙주 여왕을 직접 죽이지 않고 이런 번거로운 반역의 과정을 거칠까.
독일 호헨하임대의 크리스티안 라벨링(Christian Rabeling) 교수는 사이언스지에 “직접 여왕을 죽이는 전략이 매우 잔혹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생 개미는 여왕의 다리와 날개, 더듬이를 잘라낸 후, 목을 베거나 목을 물어 굶어 죽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두 방법 모두 시간이 걸려 여왕을 보호하는 일개미들의 역공을 부를 수 있다. 라벨링 교수는 “딸 개미들을 조종해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모친 살해가 다른 곤충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아보겠다고 밝혔다. 다카스카 교수는 “개미산으로 폭력적 반응을 유발하는 것은 불개미아과(Formicinae)뿐이지만, 이를 사용하지 않는 개미나 사회성 말벌도 유사한 방식으로 모친 살해를 저지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세라에아 비로이(Ooceraea biroi) 종 약탈 개미의 일개미. 왼쪽은 일반 일개미이고 오른쪽은 돌연변이로 여왕개미처럼 날개가 생겼다. 가짜 여왕개미는 일을 팽개치거고 동료에 기생했다./Current Bi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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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개미 판도 존재
기생 개미는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내부에서도 여왕 행세를 하는 가짜가 있다. 록펠러대의 크로나우어 교수는 지난 2023년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복제 약탈 개미(clonal raider ant)’ 한 종에서 날개가 달린 돌연변이 일개미가 빈둥거리며 동료에게 기대 사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약탈 개미는 다른 개미굴에 쳐들어가 알이나 애벌레를 훔쳐 먹이로 삼는다. 돌연변이 일개미는 여왕개미처럼 날개가 생겼다. 이들은 진짜 여왕개미라도 된 듯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개미들의 보살핌을 받고 편히 살았다.
연구진은 돌연변이 개미의 행동을 알아보기 위해 한쪽 집에는 변이 개미만 넣고 다른 집에는 일반 개미를 넣었다. 척후병이 먹잇감을 발견하고 집에 오자 일반 일개미들은 모두 나와 먹잇감으로 달려갔다. 반면 날개가 생긴 가짜 여왕개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좌의 게임이든 기생충이든, 영화나 드라마 소재는 자연에 널려 있는 셈이다.
참고 자료
Current Biology(2025), DOI: https://doi.org/10.1016/j.cub.2025.09.037
Current Biology(2023), DOI: https://doi.org/10.1016/j.cub.2023.01.067
이영완 기자(ywl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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