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도 바둑은 고급 취미여서 왕이나 대신들은 바둑 두는 것을 좋아했었다.
바둑은 상대가 있고 상대의 수를 읽어 대응하는 것이라 정치나 전쟁의 축소판 같았기 때문이다.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동대사 정창원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바둑알과 바둑판이 보관되어 있다.
바둑알은 상아로 만들었는데 한반도 생산품이 아니고 외국산 수입품이었다.
바둑알은 붉은색과 남색으로 곱게 물들인 후 표면에 새가 꽃을 머금고 날아가는 무늬를 새겨 넣었다.
꽃가지를 물고 있는 함화조문(銜花鳥文)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중국 한나라 대부터 비롯된 문양으로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문양이다.
상아에 색을 입히고 새김 장식을 하는 기법을 일본에서는 발루(撥鏤)라고 한다.
바둑판은 본체를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자단목으로 얇은 판을 붙이고 상아와 목재, 금속을 사용하여 상감기법으로 장식했다.
이를 목화기법이라 한다.
특히, 바둑판 측면은 상아로 표현된 낙타와 서역인, 새를 조각했고 한쪽 측면에는 거북이와 두꺼비를 본뜬, 바둑알을 넣는 서랍을 두었다.
서랍은 한쪽을 빼면 다른 한쪽도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둑판 면은 상아로 선을 그었으며 바둑알을 놓는 표시인 화점은 17개였다.
또 바둑판을 넣는 함을 금은귀갑기국감이라 하는데 소나무 목재에 상아로 귀갑문의 선을 그었으며 위에 동물의 발굽이로 추정되는 얇은 판이 부착되어 있다.
얇은 판 밑에는 꽃문양을 그리고 금박과 은박을 붙였다.
바둑알은 나무로 기형을 만들고 평탈기법으로 장식한 원통형 합에 넣었다.
합의 뚜껑 테두리는 연주문을 둘렀으며 가운데 부분에 나무아래로 꽃가지를 물고 있는 새를 표현했고 중앙에는 코끼리를 새겨넣었다.
이렇게 바둑알 600개를 은평탈합에 넣고 바둑판은 금은귀갑기국감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바둑알과 바둑판을 넣은 합과 감을 결이 고운 느티나무에 붉은 칠을 바른 고급 수납장(廚子)에 넣어 보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인 바둑알과 바둑판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정창원 북창 소장 국가진보장 내용에 "적칠관목 수납장 1구를 백제국왕 의자가 일본의 내대신에게 준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에 납물로 바둑알을 담은 은평탈합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의자왕이 일본(왜국)의 내대신에게 보낸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선물이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하고 또 상대가 감동할 수 있게 정성을 듬뿍 담아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특히 바둑 선물은 아무에게 주지 않는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신분을 고려하고 상대의 기호를 파악하고 준다.
당시 한반도 삼국과 일본의 정치가들은 바둑을 취미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로 만나서 대국을 두진 못하지만 바둑으로 친구가 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으니 정치가에게 바둑은 안성맞춤의 선물이었다.
의자왕은 왜 이처럼 공을 들여 바둑 선물을 준비했으며 그것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백제의 국왕이 주는 선물이라면 당연히 일본의 국왕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는 내대신이란 직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내대신 직위에 있던 인물은 을사정변(645년)으로 일본 정계를 장악한 실권자 후지와라 가마타리였다.
본명이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인 그는 일왕으로부터 후지와라 씨명을 하사받고 일본의 1천년 세도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을 창설한 시조이다.
우리나라 안동김씨는 겨우 60년 세도를 했으나 후지와라 가문은 외척으로 무려 1천년이나 세도를 누렸다.
의자왕은 최고의 재료, 최고의 공예기술, 최고의 고급 포장을 한 바둑판과 바둑알을 왜 일본 정계의 실권자 가마타리에게 주었을까.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의자왕이 가마타리에게 선물을 준 시기는 서기 653~656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왜 일왕이 아닌 내대신에게 바둑알과 바둑판을 선물로 주었을까.
이 문제를 풀려면 당시 일본 조정의 세력 판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마타리는 훗날 덴지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와 손잡고 당시 일본 조정의 외척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소가씨를 살해한 을사년 쿠데타의 주역이다.
소가씨는 친백제계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았으니 백제로서는 가마타리의 성향에 주목했을 것이다.
즉 일본의 외교가 친백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친신라로 변경될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챈 의자왕은 중요한 시점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의자왕 13년(653년) 8월에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王與倭國通好)."라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에도 654~656년에 백제가 조(調)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백제와 일본이 수교를 맺으면서 일본 외교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대신 가마타리에게 의자왕이 선물을 보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선물은 주효했을까? 마침 654년은 고토쿠(孝德) 일왕이 사망하고 친백제계로 알려진 고교쿠(皇極) 여왕이 다시 사이메이(齊明) 일왕으로 복귀한 해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의 외교가 그간 애매한 입장에서 다시 친백제 외교 노선으로 선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자왕이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선물을 보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고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663년 백제의 재건을 위한 건곤일척의 백강 전투에 일본 조정은 2만 7천명의 대병을 파병하여 백제의 부흥을 지원했다.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얼마 전 경주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에게 이재명 대통령은 본비자 원목으로 만든 최고급 바둑판을 선물했다.
시진핑 주석은 바둑광으로 알려질 정도로 바둑을 즐긴다고 한다.
이에 앞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이 옥으로 만든 바둑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또한, 2014년 시진핑 주석이 방한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신석으로 만든 바둑알을 선물한 바 있다.
그러니까 한국과 중국 정상들이 10년 사이에 서로 바둑을 선물로 주고 받은 셈이다.
일본이 아닌 중국과의 바둑 외교지만, 바둑이 현대 정치에서도 유효한 선물로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바둑이 주는 메시지는 바둑을 두는 것처럼 상대를 존중하고 한중관계가 깊고 숙고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더불어 한국과 중국이 세계바둑계를 양분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바둑은 상징성과 함께 실용성을 겸비한 선물이다.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의자왕,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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