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인해 경찰이 2차 압수수색을 벌인 10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모습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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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큰 마음 먹고 쿠팡 멤버십을 해지했다.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다시는 쿠팡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로켓배송의 편리함을 포기한다는 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으로서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멤버십 해지 과정에서 할인 쿠폰으로 유혹하는 쿠팡의 달콤한 제안도 이겨내고 미로 속 꽁꽁 숨어있는 해지 버튼을 찾기까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번뇌도 수차례 일었다. 결국 해지에 성공했지만, 내심 로켓배송을 누릴 수 없다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계기는 '쿠팡 블랙리스트' 사태였다. 사업장 내 성희롱, 절도, 폭행 등 사규 위반을 일삼는 이들을 관리했다는 쿠팡의 해명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쿠팡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해 온 동료 선후배들이 명단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보고 멤버십 해지를 결심했다. 고객 한 명 줄어든다고 쿠팡에 위협이 되겠느냐만, 적어도 생각과 행동의 일관성은 지키고 싶었다.
부끄럽게도 불매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활의 불편함 앞에 신념은 무력했다. 두 달 전쯤 쿠팡 멤버십을 재가입해 세탁 세제를 주문했다. 세종시 사택에서 당장 다음 날 쓸 세제가 필요했는데 마트에 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로켓배송을 이용했다. 월 회비 7,890원에 2만 원 할인 쿠폰도 받았다. 세제 하나도 다음 날 새벽 배송해주는 쿠팡의 서비스에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다.
지난달 20일 쿠팡은 고객 3,37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실을 인정했다. 어김없이 △이름 △이메일 주소 △배송지 주소록 △주문정보가 '노출'됐다는 쿠팡의 공지 문자가 왔다. 한두 번 겪는 유출 사고가 아닌 만큼 놀랍지도 않았지만 쿠팡의 대응 방식은 대단했다. 개인정보 '유출'을 '노출'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등 책임회피식 대응은 블랙리스트 사태 때나 지금이나 전혀 바뀐 게 없었다. 그때와는 공분의 크기가 다르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만 한데, 쿠팡 경영진만 모르는 것 같다.
쿠팡 회원탈퇴 안내 화면. 쿠팡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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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쿠팡을 또 한 번 떠나기로 결심했다. '회원 탈퇴하기'를 찾는 데만 5분 넘는 시간을 들여 과정을 마쳤다. 데이터 분석업체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6일 기준 쿠팡의 일간 활성화 이용자(DAU)는 1,594만 명으로 1일(1,798만 명) 대비 204만 명이 줄었다. 쿠팡의 독점에 가까운 시장 지위 등으로 록인(Lock-in) 효과로 소비자 이탈이 제한적일 거라 전망됐지만 쿠팡에 실망한 소비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소비자들은 쿠팡의 편리함에 길들여졌지만 소비자들로 하여금 '불편한 소비'를 감내할 수 있도록 쿠팡은 그들을 내몰고 있었다. 록인 효과도 영원하지 않다. 소비자의 신뢰를 잃은 플랫폼은 대체제가 등장하는 순간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세종= 이성원 기자 suppor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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