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도 조절 실패” 평가원장 사임
前 정부도 ‘킬러 문항’과 싸웠지만
결과는 불수능 비명 터져나와
정치적 땜질 말고 근본적 혁신을
올해 수능 영어는 1등급 비율이 3.1%로, 절대평가로 전환된 2018학년도 이래 가장 낮아 ‘불[火] 영어’를 넘어 ‘용암(鎔巖) 영어’로 불렸다. 수험생 사이에서 “사교육 부담 줄여준다고 절대평가 해놓고 상대평가(1등급 4%)보다 어렵게 내면 어쩌란 말이냐”는 불만이 쏟아지자 대통령실까지 진화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입시 전문가들은 이런 정치적 개입으로는 ‘용암 수능’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지금도 한 달 넘게 합숙하며 중압감을 견뎌야 해 출제진 섭외가 쉽지 않은데, 앞으로 누가 그 자리를 맡겠냐는 것이다. 능력 있는 출제진이 빠져나가면 난이도 조절은 더 어려워진다.
윤석열 정부 때도 비슷한 ‘킬러 문항 사태’가 있었다. 재작년 6월 당시 윤 대통령은 “수능에서 킬러(초고난도) 문항을 내지 마라”고 교육부에 지시했다. 공교육만으로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내면 학생들이 사교육에 더 의존하게 된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6월 모의고사에서 ‘킬러 문항’이 나왔다는 이유로 교육부 대입 국장을 경질했고, 평가원장도 연달아 사퇴했다. 수능 문제에 오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의고사에 어려운 문제가 나왔다고 평가원장이 물러난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교육부는 수능 출제 과정도 대폭 바꿨다. 출제진을 ‘무작위 추첨’으로 뽑았고, 입시 학원에 수능 문제를 판 교사들은 배제했다. 킬러 문항만 골라내는 ‘점검 교사단’도 꾸렸다. 700명이 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수능 출제진이 투입됐다.
만반의 준비 끝에 진행된 2024학년도 수능은 그러나 예상과 정반대 결과를 낳았다. 국어·영어·수학 모두 역대급으로 어려운 ‘용암 수능’이었다. ‘킬러’는 없앴지만 상위권 변별력을 갖추려 한 단계 낮은 ‘준킬러’를 촘촘히 배치해 오히려 난도가 높아진 것이다. 여러 이유로 출제진을 배제하면서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빠진 점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전 과목 만점자는 단 1명 나왔는데, 킬러 문제 대비에 특화된 서울 강남 학원을 다닌 재수생이었다. 대통령의 ‘킬러 문항 때려잡기’가 강남 사교육만 홍보해준 셈이라는 씁쓸한 비판이 나왔다.
‘킬러 문항’이나 ‘용암 영어’는 단순한 난이도 조절 실패의 문제가 아니다. 30년 넘은 수능 제도 자체의 한계로 봐야 한다. 새로운 문제만 출제해야 하는데 정해진 범위에서 30년간 내다 보니 이제 웬만한 유형은 바닥이 났다. 조금만 쉽게 내도 만점자가 쏟아져 열심히 공부한 최상위권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변별력을 갖추려고 문제를 더 비틀고 배배 꼬게 되는 것이다. 올해 수능 영어 한 지문의 원저자는 “원어민조차 모르는 단어가 출제됐다”고 비판적 의견을 냈다. 변별력 때문에 교수도, 원어민도 못 푸는 문제가 양산되고 수험생을 괴롭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평가원장이나 책임자의 사퇴로 봉합될 문제가 아니다. 대입 제도는 학교 교육 과정, 내신 평가, 고교 유형까지 긴밀하게 얽혀 있어 수능만 바꾸는 땜질 처방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입시 제도와 학교 교육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난이도 조절 실패의 변명 뒤에 숨지 말고, 대통령이 나서 이 중대한 과제를 직시하라. AI 시대에 인재 육성 방향에 대한 고민과 혁신이 없다면 국가의 미래를 킬(kill)하게 될 것이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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