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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권근영의 아는 그림] 예술가의 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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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권근영 문화부 기자


    설치미술가 이불(61)의 서울 성북동 작업실에 갔을 때 일이다. 낯선 기자의 방문에 개 세 마리가 계속 짖었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며 돌아보니, 황구 한 마리가 담벼락에 앉아 물끄러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술가의 개는 철학도 하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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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를 다시 본 건 4년 뒤인 2012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였다. 1990년 도쿄 퍼포먼스 때 입은 촉수 가득한 붉은 보디슈트부터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새하얀 사이보그까지 시기별 그의 작업이 마천루 53층의 전망대 미술관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압권은 마지막 방. 통유리벽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산산이 토해내고 있는 크리스털 개, ‘비밀 공유자’(사진)였다. “15년간 키우던 황구가 2년 전쯤 죽었다. 그림 그릴 때면 옆에 앉아 창밖으로 시내를 보다가 어느 순간 먹은 걸 토하곤 했다. 내 중요한 시기를 함께 보냈던 개”라고 당시 작가는 돌아봤다. ‘비밀 공유자’는 흡사 이전 작품을 게워내며 새로운 꿈으로 향하는 예술가를 닮았다.

    이불의 30년 궤적 1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내년 1월 4일까지 이어진다. ‘비밀 공유자’ 대신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문을 지켰던 대형 조각 중 한 점이 나왔다. 전시장에는 지난 세기 초 번영의 상징이던 은빛 비행선이 둥둥 떠 있고, 4m 철탑엔 에스페란토어가 반짝인다. 실패한 유토피아의 상징물들이, 끝내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응원 같다. 무엇을 토해내며 나아갔든 올 한 해,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듯한 장면이다.

    권근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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