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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문태준의 마음 읽기] 맑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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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문태준 시인


    동지가 지나고 벌써 한 해가 끝날 무렵에 이르렀다. 그저께 동지에는 절에서 쑨 팥죽을 얻어와 먹었다. 한 해를 새롭게 맞은 일이 어제의 일 같은데 벌써 끄트머리에 섰다. 시간의 흐름은 쏜 화살보다 빠르다. 하지만 12월이라고 해서 끝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수선화가 막 피고 있다. 꽃의 흰 빛이 싱싱하고 맑다. 집 화단의 수선화를 아침과 저녁에 한 차례씩 바라볼 적엔 깨끗한 물로 얼굴을 씻은 것만 같다.



    연관스님이 번역한 불교 고전

    세상 평화 기원한 손호연 시집

    내 얼굴 씻겨주는 맑은 문장들

    중앙일보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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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즘 두 권의 책을 펼쳐 읽고 있다. 이 책들에서도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데, 한 해의 막바지에 읽고 있으니 역시 세수를 한 듯한 느낌이다. 한 권은 『마음의 노래, 주심부』라는 제목의 책이다. 아주 두껍다.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한다. 최근에 제주에 있는 절인 선래왓에 들렀더니 주지이신 인현 스님께서 읽어보라며 주셨다. 스님은 문장이 빼어난 분이어서 산문집을 내기도 하셨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라 인사를 드릴 겸 해서 오랜만에 찾아뵈었더니 거처하시는 요사채의 외벽에 현판을 걸어 놓으셨다. ‘여소(旅巢)’라고 쓴 글씨였다. 그 뜻을 여쭤보니 여행자가 거주하는 둥지라는 의미라고 하셨다. 여행자는 머무는 곳에 집착이 없어서 떠날 것을 알고, 둥지는 새의 둥지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니 이 또한 언젠가 비워질 것을 안다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스님은 책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셨다. 이 책은 연관 스님께서 번역하셨는데,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 스님을 모셨던 후학 스님들이 조금 가다듬고 각주 작업을 해서 펴냈다고 하셨다. 책에는 연관 스님을 모셨던 후학 스님들의 법명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법명 아래에는 ‘돈수(頓首)’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돈수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린다는 말이니 연관 스님에 대한 존앙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현 스님과 헤어질 때에 선래왓의 차밭을 잠깐 둘러보았는데, 아직 차꽃이 피어 있었다. 스님께서는 차꽃을 따서 손에 쥐여 주셨다. 오는 내내 차꽃의 은은한 향을 맡았다.

    책을 받아와선 그 분량에 압도되어 엄두를 내지 못하다 요 며칠 펼쳐 잠깐씩 읽어 보았다.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삼라만상에서 틔워진 싹이 온 대지를 거두고 있듯이, 만물에서 발생한 생명이 다 같이 하나의 기운을 머금고 있듯이, 현묘하고 아득한 깊고 깊은 힘을 스스로 갖추고 있네.” 마음에 관한 이 문장은 모든 이들이 지혜와 자비의 밝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맥락으로 여겨졌다.

    오래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다음의 문장이었다. “뱀을 삼킨 줄 알고 얻은 병은 모두 의심에서 생겨난 것이요, 모래를 걸어 놓고 배고픔을 달램은 다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네.” 이 문장에는 배경이 되는 일화가 있었다. 한 사람이 술잔을 받았는데 그 잔 속에 뱀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두려움이 생겼는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다른 사람이 활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여주고선 술잔 속의 뱀은 활에 그려진 뱀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해보라며 권하자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간주했더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모조리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일화는 이러했다. 기근이 들어서 한 가족이 끼니를 잇기 어려웠고, 어린아이가 밥을 달라며 울자 그 어머니가 묘안을 내어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놓고선 그것을 밥이라고 속였더니 아이가 그런 줄로 알고서 울음을 그쳤다는 것이었다. 이 두 일화도 마음에 관한 일화이니 결국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에 달렸다는 가르침인 듯했다.

    내가 읽고 있는 두 번째 책은 손호연 시인의 시집이다. 제목은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아온 나 오로지 평화만을 기원했네』이다. 손호연 시인은 일본어로 단가를 썼던 시인이었다. 조병화 시인은 손호연 시인의 작품들에 대해 “일어로 표현했지만 그 정신만큼은 한국인의 혼과 정서를 담은 훌륭한 시인이다”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시편들에는 국경과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고아한 정신이 담겨 있었다. 사랑과 평화를 짧은 시에 실은 작품들이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겐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이라고 쓴 시는 차별과 전쟁과 폭력과 난폭함에 휩싸여 있는 지금 시대의 모든 세계인에게 들려주는 시인의 당부이면서 직언이라고 할 만했다. “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뿐히 내리네”라고 쓴 시와 “똑같은 높이로 눈은 쌓이네. 키 큰 항아리 앞 작은 단지 위에도”라고 쓴 시를 읽었을 때의 감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맑은 시심으로 노래한 시편들을 읽으며 겨울밤을 보내고 있다.

    또 한 해를 떠나보내면서 올해를 살아온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내 마음이 적어놓은 일기(日記)를 펼쳐 읽어본다. 내 마음의 일기가 두 권의 맑은 책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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