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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을 겪는 이들은 무기력한 환자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먹지 않고,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다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자신이 잠수함의 토끼처럼 느껴질 때, 유일하게 자신의 힘을 사용할 대상은 자기 몸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자기 통제는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이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몸이 바로 나다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모임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대표 박지니)가 주최하는 섭식장애 인식 주간(EDAW·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이 올해로 4년째를 맞았다. 한층 심도 있고 글로컬한 프로그램으로 2월21일~3월1일에 진행되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단체명은 ‘탄광의 카나리아’ 원리에서 나왔다. 예전 잠수함은 산소측정기가 없어서 산소에 민감한 토끼를 태웠고 토끼가 괴로워하거나 죽으면 즉시 물 밖으로 나와 산소를 공급했다고 한다. 여기서 ‘탄광’이나 ‘잠수함’은 무엇을, 아니, 어디를 뜻하는 것일까. 나는 ‘잠수함’이 모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섭식장애는 개인적 고통이면서 매우 복합적인 사회적 문제이기에, 토끼와 잠수함은 좋은 비유다.
거식증을 앓았던 딸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그린 김보람 감독의 2023년 개봉작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이 ‘질병’이 얼마나 사회적 구조의 문제인가를 잘 보여준다. 처음 이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는 거식증에 관심을 갖고 봤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여성의 생애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3대의 이야기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살아남은’ 여성(엄마) 그리고 우울증과 거식증에 걸린 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이에 대처하는 여성의 능동성과 투쟁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을 존경하게 되는 영화였다.
여성의 몸은 전쟁터
굶주림이든 많이 먹든 안 먹든, 지금 지구상에서 먹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은 거의 없다. 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 이미지는 미디어와 타인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다. 혹자는 자기 만족이나 자기 계발이라고 말하지만, 그 ‘자기’ 역시 사회의 반영이다. 먹는 문제는 여성의 자아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 몸에 만족하는 여성은 드물다. 168㎝의 키에 48㎏이 워너비였던 시대도 지났다. 지금은 170㎝에 40㎏인 여성이 인플루언서다. 일명 ‘뼈 말라’로 불리는 여성들이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섭식장애는 거식증과 폭식증만이 아니라 심각한 우울 증상과 더불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증상이 넓고 복잡한 현상이다. 섭식장애는 성별, 인종, 계급에 상관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왜 특히 여성은 음식과의 화해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레스토랑에서 팔리는 ‘돈이 되는 음식’은 주로 남성인 전문직 셰프가 조리하고, 여성은 성 역할의 일환으로 일상적으로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상반되는 두 가지 현실이 모두 여성의 성 역할이라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먹을거리가 없어서 여성은 가족들에게 음식을 양보하거나 부뚜막에서 남은 음식을 먹었고, 당대는 적게 혹은 먹지 않음으로써 ‘아름다운 몸’이라는 성 역할을 수행한다.
매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진행되는 섭식장애 인식 주간이 되면, ‘준(準)당사자’인 나 역시 복잡한 심경으로 내 몸과 주변을 살피게 된다. 어려운 여건에서 이 행사를 주관하는 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몸무게 걱정만 하고, 음식 조절과 운동은 안 하면서 많이 먹는 타입이다. 이 이중의 스트레스 상태로 평생(?)을 살고 있다. 섭식장애를 인식하는 운동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여성이 자기 몸을 돌볼 수 있도록, 사회적 응원과 지지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미술가 바버라 크루거의 작품 ‘여성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 ground)’는 끈질긴 현실이다. 여성의 몸(존재성)이 젠더, 계급, 인종, 종교, 국가 등 모든 권력 투쟁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만큼 여성의 타자성을 증거하는 것이 또 있을까.
거식증을 겪는 이들은 무기력한 환자가 아니다. 주체적으로 먹지 않음으로써, 자기 몸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자신이 잠수함의 토끼처럼 느껴질 때, 유일하게 자신의 힘을 사용할 대상은 자기 몸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자기 통제는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몸(social body)이 나다.
자기 돌봄과 자기 통제
자기 돌봄과 자기 통제는 다르다. 전자는 ‘강자’, 후자는 ‘약자’의 행위다. 한마디로, 세상을 힘이나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통제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볼모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여성의 ‘건강한 섭식’과 이동의 자유는 여성의 몸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기제다. 사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여성이 자기 몸을 이동시키는 것, 집 밖으로 나오기, 혼자 여행하기는 여전한 투쟁의 목표다. ‘집 밖의 여성’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며,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여성이 있어야 할 장소는 ‘집’이어야 한다(한자 ‘安’을 생각해보라). 남성의 가출은 ‘출가’로, 여성의 가출은 그저 ‘가출’로 인식되는 세상은 지속되고 있다.
자전거 등 도구를 이용한 외출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불문하고 여성이 삶의 주도권을 갖는 첫걸음이다. 얼마 전 나는 <여성, 자전거, 자유-자립의 도구, 불확실성을 다루는 기계,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관문>(마리아 E 워드 지음, 이민경·변유선 옮김, 앨리스 오스틴 삽화, 유유, 2026)을 읽고, 새삼 맥락적 지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여성을 위한 자전거 타기(Bicycling for Ladies)’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130년 전 미국에서 쓰인 자전거 타는 법이 왜 번역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책 내용은 글자 그대로 자전거 타는 법이 전부다. 건조하고 실용적인 문체, 그냥 제품 사용 설명서 같다. 그러나 이러한 글도 여성의 탈것과 이동에 관한 문제라면, 완전히 맥락이 달라진다. 여성의 이동과 공간적 주체 되기는 젠더 문제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 책은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대한 비유이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다음의 글귀를 보라. 책 속의 문장들이다. “자전거를 이기려 들지 말 것, 배워야 할 사람은 자전거가 아니라 당신이다” “어떻게 대열을 유지하며 함께 주행할 것인가는 골치 아픈 문제다” “적재적소에서 페달을 밟아라” “자신의 제동거리” “방향 조정은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주제” “언덕 오르기에 도전하기” “길 위의 바람” “부상과 자신의 한계” “중요한 사항에 관심을 갖고 기꺼이 공부해야 하며” “힘으로 속도를 얻는다는 것은 곧 속도를 얻는 만큼 힘이 소모된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페이스” “완벽한 자전거는 없다”… 일일이 적을 수 없다. 너무나 중요한 인생록(人生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음식이나 이동이 젠더 문제와 결합하면, 특별한 이슈가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중대한 인생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음식과 이동은 여성과 장애인에게 일상을 영위하는 이슈이자 생사를 가르는 문제다. 여성과 장애인은 주로 집에 있거나 집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들의 이동은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매년 3월8일은 1975년 유엔이 지정한 ‘세계여성의날’이다. 1908년 미국에서 1만5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평등권 보장과 노동조합 결성,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를 기념해 제정한 날이다. 1910년 독일의 공산주의자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의날을 국제 기념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후 각 사회에서 여성의날은 그 지역 문화에 스며들었다. 중국 대도시에서는 여성에게 금값을 할인해주고, 회사에서 꽃다발을 주는 나라도 있다. 한국은 여성운동이 주도하는 각종 기념식이 열린다.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날이지만, (유엔이 공식 지정한) ‘남성의날’은 없다. 여성의날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날이 남성의날이다. ‘이성애자의날’ ‘비장애인의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의날을 여성 우위 사회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왜곡시키는 또 다른 차별이다. 매년 이맘때 여성들은 기쁘지 않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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