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간) 호주 아시안컵에서 한국과의 경기 전 국가가 연주될 때 침묵하고 있는 이란 여자 축구대표팀.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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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지용은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해협’)이라 했다. 짙푸른 현해탄 하늘을 보며 “참하 꿈엔들 잊힐리”(‘향수’) 없는 고향을 그리면서였을 것이다. 청춘 외엔 아무것도 없이 타향을 떠도는 망국 시인의 절절함이다.
이란 여자축구 대표선수 5명이 10일 호주에 망명했다. 지난 2일 한국과의 아시안컵 경기 때 국가 제창을 거부해 신변 위협을 받던 이들이다. 이란 국영방송은 “국가 제창 거부는 애국심 결여의 극치”라며 그들을 ‘전시 반역자’로 몰았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4년 전 카타르 월드컵 때도 이란 선수들은 국가 연주 때 침묵으로 마흐사 아미니 의문사 시위 유혈 진압에 항의했다. 이번엔 전쟁과 시민 수만명을 학살한 이란 내부의 정치적 광기가 그들을 더욱 벼랑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망명자가 된다는 건 삶의 변경을 선택하는 일이다. 암흑 같은 시대와 공간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송두율이 평생 고향(제주도)을 그리워하면서도 ‘경계인’으로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 제창을 거부했다고 그들이 반역자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조국’은 단순히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국가의 특정한 한 시기를 명명할 뿐인 정부는 더더욱 조국의 동의어가 아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게 법이라면, 조국을 정의하는 것은 정체성이다. 조국은 ‘언어·문화·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시민 개개인의 삶이 모인 역사공동체이다.
근대 정치철학에서 ‘폭정’은 저항하고 거부해야 할 대상이다. 시민이 주권의 원천이다. 정부나 국가는 그 도구에 불과하다. 국민을 배반한 정부를 향한 항의는 반국가행위가 아니라 시민의 책임이 된다. 이란 축구선수들이 거부한 건 주권을 사유물처럼 변질시킨 불의한 정부이지 조국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조국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국가 제창 거부는 ‘정체성의 고향’인 조국에 대한 긍정으로 읽힌다.
망명한 그들이 겪을 고통이 눈에 선하다. 고향에 남은 사람에 대한 마음의 짐이 가볍지 않을 것이다. 태평양 하늘을 보며 그들은 어떤 조국을 떠올리게 될까. 망명자들의 정체성은 늘 그처럼 ‘그리움’ 속에 있다.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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