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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2 (목)

    “6,4,0,9…" 이란 전쟁에 재등장한 냉전 시대의 ‘숫자암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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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두 차례...CIA가 이란 내 정보원들에게 보내는 암호 메시지인 듯

    인터넷ㆍ전화 끊긴 상황에서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식

    미국이 2001년 아프간 침공했을 때, 러시아도 ‘숫자 방송국’ 운영

    매일 오전 5시30분과 밤 9시30분(테헤란 시간), 이란 전역에서 수신되는 단파 라디오 방송에서는 잡음 섞인 남성이 페르시아어로 숫자를 읽어 내려간다. 방송은 한 번에 1시간30분가량 지속된다.

    “타바조!(주의) 6,4,0,9,3,9…”

    2월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처음 공습한 직후부터 서유럽 어느곳엔가에 있는 송신기에서 장거리 단파(shortwave) 라디오를 통해 이 유령 같은 ‘숫자 방송’이 정기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직 미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인용해 “이 방송은 미국이 이란 내부의 정보원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 통신 수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란 공습과 함께 시작한 이 ‘숫자 방송’은 며칠 동안 전자 신호음과 ‘삐’ 소리에 묻혀 잠시 들리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이란 측이 방송을 방해(jamming)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남성은 다른 주파수로 이동한 뒤 다시 숫자를 읽기 시작했다.

    이 방송은 이른바 ‘숫자 방송국(number station)’이다. 정보기관이 암호화된 지시를 스파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파 라디오 송신 방식이다. 단파 방송은 지구 대기의 전리층(ionosphere)에 반사돼 수천 ㎞까지 전파된다. 단파 방송 ‘KBS 월드 라디오’가 북한 주민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극동, 중동까지 해외 청취자를 대상으로 방송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 모스크바 지국장이었던 존 사이퍼는 FT에 “아마도 이란 내부에 있는 우리 정보원들과의 예비 통신 수단일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시작되면, 결코 연락이 끊겨서는 안 되는 이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완벽한 비상 대안(代案)”이라고 말했다. 이란 내 미국 정보원들은 라디오와 일회용 암호표만 있으면, 이 숫자를 메시지로 해독한다.

    미국의 전직 정보요원들은 이 숫자방송이 현장 요원들에게 특정 작전을 활성화하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이동ㆍ국외 탈출 등을 지시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 ‘숫자방송국’은 단파 신호를 추적하는 민간인들이 처음 발견해 ‘V32’라는 이름을 붙였다. 페르시아어로 방송되는 ‘숫자 방송국’이 확인된 것은 25년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단파 신호를 모니터하는 단체 프리욤(Priyom)의 회원들은 신호가 여러 수신기에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해 대략적인 송신 위치를 서유럽 지역으로 삼각측정했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에도 이런 숫자 방송이 잠깐 등장했다. 당시 일부 분석가들은 사용되는 숫자의 패턴으로, 러시아가 송출하는 방송일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이란 정부가 전화ㆍ인터넷 등 외부와의 통신 수단을 모두 끊은 상황에서, 이 단파 숫자 방송은 매우 유용하다. 단파 라디오만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어서, 누가 실제로 듣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발각되기 전에 바로 채널을 돌릴 수 있고, 최신 통신 장비와 달리 공책과 암호표는 폐기하기도 쉽다.

    방송 운영자가 실수를 하거나 스파이가 숫자를 적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는 한, 방첩 기관이 할 수 있는 것은 주파수를 방해하는 것 정도뿐이라고 한다.

    이란에 미국 대사관도 없어서 정보망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미국 CIA에게 숫자 방송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활동하는 첩자들과 안전하게 통신할 수 있는 매우 요긴한 수단이 된다.

    동시에 이란 정보기관으로선 정부 기관이나 민간에서 이 ‘숫자 방송’을 청취하는 스파이를 색출하기가 매우 힘들다.

    미국도 과거 정보기관에 침투한 단 한 명의 핵심 인물이 이 숫자방송으로 지령을 받아 암약한 탓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이 몇 차례 있다.

    2001년 9월 체포된 미 국방정보국(DIA)에서 쿠바 군사ㆍ정보 분석을 담당하던 핵심 분석관 아나 발렌 몬테스는 17년간 쿠바 정보기관의 숫자 방송으로 지령을 받고 쿠바 내 미국 스파이망 정보와 미국의 쿠바 통신 감청 방식 정보를 넘겨줬다.

    미국의 전 방첩요원 크리스 시먼스는 FT에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에 이 방송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며 “누군가 목숨을 걸고 활동하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가장 단순하고 숨기기 쉬운 도구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먼스는 이 ‘숫자 방송’은 보통 가장 중요한 정보 자산에게만 사용되는 통신 방식이라고 말했다.

    FT는 “숫자 방송국은 정보기관의 활동이 대중에게 드러나는 드문 사례 중 하나”라며 “냉전 이후 줄었지만, 현재도 북한ㆍ타이완ㆍ폴란드ㆍ러시아가 정기적으로 숫자 방송국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 숫자방송이 이란 방첩기관에 편집증을 유발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다. 즉, 테헤란 내부에 워싱턴이나 텔아비브의 지시를 받는 고위급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이란 방첩기관에 압박을 가하려는 작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CIA의 리마ㆍ로마 지국장을 했던 로버트 고렐릭은 FT에 이란의 해외 반체제 무장세력이 이 방송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그는 반체제 세력이 이런 방송을 운영하더라도 서방 정보기관의 묵인 없이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란의 암호 전문가들은 이 숫자의 패턴을 분석하느라 바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올드스쿨(old school) 방식의 통신 기술이 지금도 여전히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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