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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2 (목)

    [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57] ‘자유부인’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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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소설 '자유부인'(왼쪽)과 영화 '자유부인'(1956)


    1954년 3월 12일 나는 명동의 한 다방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자유부인이 어쩌고저쩌고’ 웅성거리는데, 지금 그건 명동 바닥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다. 어제 11일, 소설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탈선적(脫線的) 시비를 박(駁)함’이라는 글을 실음으로써 이른바 ‘자유부인 논쟁’이 본격 시작됐다.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가 3월 1일 자 대학신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국가의 적”이라고 성토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는데, 이후 변호사 홍순엽과 문학평론가 백철까지 논쟁에 뛰어들어 ‘한바탕 싸움 구경(논쟁 수준이 좀 저렴한지라)’이 났다.

    사태의 대강은 이렇다. 정비석은 장편소설 ‘자유부인’을 서울신문에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총 215회 연재했다. 대학교수와 그의 부인이 쌍으로 바람을 피우는 내용인데,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비난이 집중됐고 하필 그 춤바람 난 여자가 현직 대학교수의 마누라라는 점이 또 큰 문제였다. 당시 한반도인들은 사실상 조선식 ‘성리학 중세인’들이었다. 게다가 6·25전쟁이 휴전된 지 1년도 안 된 때에 사회 지도층의 타락을 그린 소설과 소설가는 대역죄를 뒤집어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해 여성 70여 명을 농락한 제비 ‘박인수 사건’은 이 사회적 히스테리를 증폭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은 1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1956년 영화가 개봉돼 서울 단관 관객만 15만 명 이상이 들었다. ‘XX부인’ 시리즈의 고조 할머니 격인 셈. 책이나 영화나 서울 인구가 150만 명 안팎이던 시절이니 엄청난 대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유부인 파동’ 자체가 코미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과 사회는 그것을 감싼 ‘시대’ 안에서만 사고할 뿐이다. 심지어 모든 국가들이 같은 세기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한 국가 내에서도, 한 가정 안에서도 모두가 동시대인은 아니다. 이래서 우리가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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