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유부인'(왼쪽)과 영화 '자유부인'(1956) |
1954년 3월 12일 나는 명동의 한 다방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자유부인이 어쩌고저쩌고’ 웅성거리는데, 지금 그건 명동 바닥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다. 어제 11일, 소설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탈선적(脫線的) 시비를 박(駁)함’이라는 글을 실음으로써 이른바 ‘자유부인 논쟁’이 본격 시작됐다.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가 3월 1일 자 대학신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국가의 적”이라고 성토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는데, 이후 변호사 홍순엽과 문학평론가 백철까지 논쟁에 뛰어들어 ‘한바탕 싸움 구경(논쟁 수준이 좀 저렴한지라)’이 났다.
사태의 대강은 이렇다. 정비석은 장편소설 ‘자유부인’을 서울신문에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총 215회 연재했다. 대학교수와 그의 부인이 쌍으로 바람을 피우는 내용인데,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비난이 집중됐고 하필 그 춤바람 난 여자가 현직 대학교수의 마누라라는 점이 또 큰 문제였다. 당시 한반도인들은 사실상 조선식 ‘성리학 중세인’들이었다. 게다가 6·25전쟁이 휴전된 지 1년도 안 된 때에 사회 지도층의 타락을 그린 소설과 소설가는 대역죄를 뒤집어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해 여성 70여 명을 농락한 제비 ‘박인수 사건’은 이 사회적 히스테리를 증폭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은 1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1956년 영화가 개봉돼 서울 단관 관객만 15만 명 이상이 들었다. ‘XX부인’ 시리즈의 고조 할머니 격인 셈. 책이나 영화나 서울 인구가 150만 명 안팎이던 시절이니 엄청난 대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유부인 파동’ 자체가 코미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과 사회는 그것을 감싼 ‘시대’ 안에서만 사고할 뿐이다. 심지어 모든 국가들이 같은 세기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한 국가 내에서도, 한 가정 안에서도 모두가 동시대인은 아니다. 이래서 우리가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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