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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미투도 김영란법도 ‘노’라고 말할 권리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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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김영란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 인터뷰


한겨레

김영란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전 대법관)이 서울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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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국민권익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6년 만에 김영란 전 대법관이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국민 앞에 섰다. 지난달에는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 재판장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사회문제에서 한발 물러나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던 모습에서 조금 달라진 모습이다. 어떤 심정 변화가 있는지 궁금했다. 최근 일어난 미투운동과 시행 2년이 돼가는 ‘청탁금지법’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었다.



지난 4일 오전 찾은 김영란 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장(전 대법관)의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은 아담했다. 책상과 크지 않은 책장 세개,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전부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에는 꼼꼼히 첨삭한 손때가 묻어 있었다. 장식품이라고는 학교 바자회에서 10만원에 샀다는 사진작가의 흑백사진 한 점밖에 없었다.

김영란 위원장은 “아침이라 그런지 문을 연 미장원이 없더라. 1면은 신문 얼굴인데, 이런 모습으로 나가도 되려나”라며 쑥스러워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처럼 염색하지 않은 단발머리가 김 전 대법관의 상징”이라고 말하자 그는 “단발머리는 내가 원조”라며 웃었다.

김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얼굴이 가장 알려진 전직 대법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밑그림을 그려,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때문이다. 물론 재직 시절의 ‘최초 여성 대법관’도 그를 널리 알린 수식어다.

2년 전 김영란법 시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렸던 김 위원장이 다시 ‘김영란 수능’으로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했다. 지난 4월29일 국가교육회의는 2022년도 대학입시 개편안 마련을 위한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에 김영란 전 대법관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1~22일에는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 재판장으로 나섰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장을 그만둔 뒤 사회문제에서 한발 물러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던 모습에서 조금 달라진 모습이다.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공론화위를 앞둔 그는 <한겨레>의 인터뷰 요청에 여러 차례 난색을 표했다. 김 위원장을 설득해 지난 4일 서강대 연구실에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대입공론화위원장에 임명되자
‘김영란표 수능 나오나’ 기대·우려
“교육은 모든 사람이 이해관계인
우리 국민 판단할 능력 갖췄다”


“아이들 왜 행복하지 않을까” 고민
두 딸은 대안학교에 보내
“지금 같은 단순 암기 교육이
언제까지 쓸모 있을 것인가”


까다로운 ‘입시 문제’ 맡은 이유

―대입 개편 공론화위원장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맡았다. 아마 올해 한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자리가 아닐까. 벌써 ‘김영란 수능’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주변에서 다들 왜 맡았느냐고 한다.(웃음) 근데 깊게 고민 안 하려고 한다. 교육의 절차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철저하게 보여드리는 역할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결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위원장직을 수락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8월 초까지 대입개편안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더라. 시간이 없다고 하니 어찌 보면 휩쓸려서 수락하게 됐다.”

공론화위원회는 시민들이 참여해 첨예한 사회 현안의 방향을 직접 결정하는 틀이다. 숙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의 실험장으로 평가받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공론화위원회는 지난해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재개 문제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첫 공론화위를 이끈 이는 김 위원장과 함께 대법관으로 재직했던 김지형 전 대법관이다.

―김지형 전 대법관에게 조언을 구했나?

“공론화위원장직을 제안받고 곧바로 전화했더니 ‘일단 수락하라, 내가 잘 알려주겠다’고 하더라. 수락 뒤에 전화해 ‘그때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굉장히 중요하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잘하라’고만 했다. 공론화 뒤 나온 두꺼운 백서를 보내주면서 ‘아주아주 힘들었다’고 하더라.(웃음) 한국에서 대규모로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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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전 대법관)이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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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을 맡기 전까지 현행 교육제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본인은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어찌 보면 ‘주류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두 딸은 모두 대안학교를 다녔다.

“교육은 미래의 문제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나 역시 그 한계를 많이 느꼈다. 교육은 특히 다른 어떤 문제보다 시간적인 한계가 크다. ‘아이들이 왜 행복하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단순 암기 교육이 언제까지 쓸모가 있을 것인가’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 가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다.”

김 위원장의 첫째 딸은 창작 쪽 일에 종사하고 둘째 딸은 인문학을 전공했다.

―공론화를 통해 대입 정책을 결정하는 데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한국에서 교육도 ‘숙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교육은 모든 사람이 다 이해관계인이다. 꼭 교육전문가만 교육 문제를 결정해야 할까? 오히려 교육 문제만큼은 숙의가 더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때도 원자력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에게 결정을 맡겼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공직에서 일할 사람을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뽑았다. 국가에 중요한 일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의 토론을 통해 정했다. 공론조사도 그걸 본뜬 거다. 물론 (시민참여단을) 추첨까지 할 수는 없지만, 여론 분포를 사전에 조사해서 여론 향배에 비슷하게 맞춘다. 앞으로 공론화위에서 토론, 숙의하는 과정을 다 공개할 계획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16일 공론화위원회 제2차 회의를 연 뒤 언론브리핑에서 “공론화 추진 방향은 공정성·중립성·책임성·투명성 확보”라며 “이를 위해 공론화 과정에서 전문가, 이해관계자, 일반 국민에게 공평한 참여 기회를 부여하고 관련 자료를 제공하거나 규칙 등을 정함에 있어서 엄정하게 중립성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주요 대목마다 등장하는 그의 이름

김영란법에 이어 ‘김영란 수능’.

첨예한 사회 현안과 맞물려 그의 이름이 다시 호명됐다. 한국 사회가 넘어서야 할 주요 문턱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제도·정책과 맞물려 고유명사처럼 등장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입공론화위원장으로 그가 거명됐을 때 일부에서 ‘기승전 김영란’이라는 반응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공직 사회에서 그가 보여준 행보의 상징성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 위원장은 1981년 서울민사지법에 부임하면서 법조인으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그 뒤 서울가정법원, 부산지법,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법을 거쳤다. 2004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시절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40대 대법관은 1988년 김용준 대법관(전 헌법재판소장)에 이어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판결을 내놓아, 박시환·이홍훈·김지형·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형제’라고도 불렸다.

재임 시절 불치병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고 대학교 시간강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사립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판결에도 이름을 보탰다. 그는 ‘의미 있는 소수의견’으로도 주목받았다. 새만금 공사가 적법하고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이 무죄라는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상지대 임시이사의 정이사 선임은 위법하다는 판결에도 그렇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2011~12년 국민권익위원장 재직 시절 그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을 최초로 제안했다. 이 법은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며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2012년 9월 남편 강지원 변호사의 대선 출마로 권익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부턴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그런 그가 지난달 21~22일 열린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선 재판장으로 등장했다. 시민평화법정은 1968년 2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고 자신도 부상한 두 명의 베트남 여성이 한국 정부에 국가배상 소송을 내는 형식의 모의법정이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목격자의 증언과 학살에 관한 기록이 낱낱이 공개됐다. 소송기록만 3000여쪽에 이르렀다. 김 위원장은 시민평화법정을 위해 대법관 이후 8년 만에 장롱에서 법복을 꺼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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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김영란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이 위원들과 함께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회의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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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과정에서 ‘절차적 엄정함’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띄었다.

“모의법정이지만 ‘연극’처럼 비쳐서는 안 된다고 봤다. 철저하게 진짜 법정처럼 운영하려고 했다. 사전에 준비명령을 내리고, 법무부에 소환장도 송달했다. 정치운동으로만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재판 준비 과정부터 “개별 참전군인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때도 개별 군인의 형사책임은 따지지 않았다. 히로이토 일왕 등의 책임을 물은 거다. 베트남전 참전군인 대다수가 20대 초반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베트남에 간 것 아닌가. 과연 그 젊은이들이 전쟁에 대해 어떤 대비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동료가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감정 조절도 어려웠을 것이다. 참전군인도 큰 그림 속에서는 역사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이틀간의 재판을 마친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지난 22일 민간인 학살을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역사에서 괄호 쳐놓은 부분이 많았다. (참여정부 당시 과거청산을 위해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과거 정부의 비인권적 행위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지만, 그 전까지는 괄호 쳐진 부분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당시에 제대로 했으면 조사가 빨랐을 거다. 과거사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괄호 쳐진 부분을 끄집어내는 문제에 대해서 사법부에만 정리를 맡길 것인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도 같은 상황이다.”

―실제 베트남 학살 민사소송이 제기되면 어떤 부분이 법적 쟁점이 될까.

“소멸시효 문제다. 국가배상 소송은 불법행위로부터 5년 안에 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가 배상을 원하는지도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흐름 속에 있어야 하지만, 구체적 방법은 계속 논의를 해야 한다.”

그는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건 인류의 근본 가치다. 일본이 그런 근본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계속 지적하면서, (베트남 학살은)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베트남 학살 문제는 인류의 근본 가치에 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법원 ‘미투’ 왜 드물까

그가 사법연수원(11기)에 들어갔던 1978년, 연수원생 120여명 가운데 여성은 혼자였다. 남녀차별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도 보수적인 집단으로 평가받는 법원에 몸담았다. 2018년 한국 사회의 미투는 그가 일했던 법조계에서 시작됐다. 미투운동을 지켜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학 입학 뒤부터는 어디에서나 나 혼자 여자였다. 대학에서도 연수원에서도 대법원에서도. 밥 먹을 사람 구하기도 어렵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사람도 없었다. 여성이란 지위 자체가 우리 사회에선 소수자였다. 판사 2~3년 차에 가정법원을 갔는데, 이혼하면 여자는 친권도 없고 양육권만 가졌다. 재산분할도 없었고, 상대방의 불법행위를 다 입증해야만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너무 이상했다. 여성이 소수자인 시절에 여성으로서 일했기 때문에 소수자 의식이 나도 모르게 몸에 뱄다.”

―법원에서 성차별이나 성희롱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적이 있었나.

“‘법원에 여성 수가 늘어나면 조직의 질이 떨어진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판사들이 많았다. 변호사 업계나 검찰보다 법원에서 여성이 빨리 늘었다. 그래서 ‘법원 조직의 질이 먼저 떨어질 것’이라고 하더라.”

―어떻게 대응했나.

“‘우리 사회에서 우수한 여성이 다른 데서 정당하게 평가받기 어려우니까 법원으로 오는 것이다, 우수한 남성은 어디서나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법원을 성평등한 조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판사가 늘어나는 게 문제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사법행정을 장악하고 있는 ‘남자 판사님들’은 어떻게 해야 성평등한 조직이 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검찰의 서지현 검사 미투와 달리 법원에서는 크게 분출되지 않았다.

“서지현 검사가 정말 용기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한 재판부의 여자 배석판사가 재판장한테 성희롱 관련 문제를 제기했고, 재판장이 사직서를 쓴 일이 있었다. 인사이동 때마다 ‘저 판사가 그 판사지’ 하는 식으로 낙인찍혔다고 하더라. 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가해가 심한 조직이다. 굉장히 동질적인 집단이니까.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진심으로 ‘위드유’를 해줘도 제도적 보장이 안 되면 부담은 오롯이 피해자 개인의 몫이다.”

―‘미투’ 피해자만 짐을 져야 하는 상황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차 가해를 철저히 막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왜 ‘신원을 안 밝히면 미투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애초에 신원을 밝힐 수 있는 환경이 아니잖나.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니 강도·강간 당한 여성이 나오더라. 인질 상태에서 탈출한 뒤 ‘영웅’으로 쇼에 나온 건데, 우리 같으면 이런 여성이 티브이에 나갈 수가 있나? 가해자에게 화살을 돌리고, 가해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를 탓해야 한다.”

성평등은 김 위원장이 평생 동안 천착한 문제이기도 하다. 대법관 때인 2005년 성년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판결과 2006년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8년엔 미성년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아도 의사에 반해 성관계를 강요당했다면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에도 이름을 올렸다. 후배 여성 판사들과 함께 ‘여성법연구회’를 만들었고, ‘젠더법커뮤니티’로 이름을 바꿔 남성 판사들에게도 개방했다. 하지만 그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힘이 미약했던 것 같다”며 자신의 노력에 박한 평가를 했다.

―선배 법관으로서 후배 여성 판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체 여성의 삶, 전체 소수자의 삶과 자기 삶을 연결해보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면 한다.”

인터뷰 도중 김 위원장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에 관한 책을 한 권 보여줬다. 미국의 한 중학교에서 마약 소지가 의심된다며 13살 여학생을 알몸 수색한 것에 대해 2009년 연방대법원이 “사생활 침해에 해당한다”며 위헌으로 판결한 것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판결 전 언론 인터뷰에서 “(남성 법관들은) 13살 여자아이로 살아본 적이 없다. 13살은 여자에게 매우 민감한 나이다. 나는 동료들 중 몇몇은 끝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쓴소리를 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평생 다수자 그룹에 있었던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미투 관련해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남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느냐’는 사람도 있지 않나. 남성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여성 입장에서는 예민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의식이 있어야 좋은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 판사니까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고 주류사회에 안주해버리는 걸 경계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2018년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졌다고 보나.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가 잘못 적용되는 권위주의 문화다. ‘노’(NO)라고 말하지 못하는 문화다. 청탁금지법도 공무원들이 ‘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만든 것이다. 미투도 마찬가지다. 강자들은 약자가 ‘노’라고 했을 때 ‘노’라고 해석하지 않거나, ‘마음속으로는 ‘노’가 아닐 것’이라고 받아들이곤 한다. 아예 발언권 자체가 폄하당하는 것이다. 미투는 ‘노’라고 말할 권리를 확보하는 문제이자, ‘노’라고 받아들여질 권리에 관한 운동이라고 본다.”

“여자 늘어나면 조직 질 떨어진다”
공공연히 말하던 남성 판사들
재판장에 문제제기한 여성판사
‘저 판사가 그 판사지?’ 낙인


“청탁금지법 소소한 걸 규제해도
결국 거악 문제 삼을 수 있게 돼”
“촛불 이후 ‘일상의 민주주의’가
같이 가지 않으면 되돌아갈 우려”


일상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부정한 청탁을 차단하고, 대학입시 하나로 인생이 결정되는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아닌 것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고통스러워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법관 퇴임 뒤 그의 행보들은 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과 닿아 있다.

―촛불혁명 이후 1년 반 동안 한국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

“대의민주주의는 똑똑한 엘리트를 뽑아서 정치를 대신 맡겨보자는 것이다. 교육을 받고 토론할 능력도 되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과 구분되는 소수였던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다.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70%에 이르고 대학에 안 가도 인터넷으로 원하는 지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초지식 대중화 시대다. 지금은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다. 시민평화법정도 증인들이 와서 발표하고 시민들이 방청석에서 보고 ‘이쪽 혹은 저쪽 주장이 옳겠구나’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판단할 능력을 갖췄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평화법정도, 공론화위원회도 민주주의를 실제로 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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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서 재판장인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결선고문을 읽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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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이 다시 가져오는 것은 오래된 자연권이다. 일상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 영역뿐 아니라 기업, 학교, 가정, 소집단 등에서 모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지금 미투를 비롯해 우리 안의 비민주주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우리 모두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상의 민주주의와 같이 가지 않으면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탁금지법이 오는 9월 시행 2년을 맞는다.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추진했던 취지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평가하나.

“청탁하고 접대하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국민 스스로 생각해주길 바랐다. 내가 도덕 선생님도 아닌데 뭐가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한지 말하자는 게 아니었다. 관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역할은 했다고 본다. 인식의 전환이 한번 일어나면 설령 일시적으로 몇 걸음 뒤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곧 다시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부 조항은 벌써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래도 위반에 따른 위험부담이 예전보다 커졌다. 위반 행위를 하나하나 찾아내라는 게 아니다. 청탁금지법은 형법과 다르다. 곧바로 처벌하지 않는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먼저 제시한 뒤, 청탁이 오면 거절하라고 한다. 그러고도 안 지키면 그때야 비로소 처벌하는 거다. 스스로 자기 행동에 대한 윤리 규범을 세우라는 것이다.”

―최근 ‘장충기 문자’ 등이 폭로되면서 우리 사회 기득권층 내부의 로비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청탁금지법의 필요성이 재확인된 부분이란 평가가 나온다.

“예전에는 ‘전화 한 통 갖고 뭘 문제 삼느냐’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인식의 전환이 생기게 됐다. 청탁금지법이 소소한 걸 규제하는 것 같지만 큰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길 기대한다. 이 법 자체로 거대 부정부패가 바로잡히진 않는다. 다만 우리 일상을 돌아보면서 결국 그런 거악조차도 문제 삼을 수 있게 만들 수는 있다. 문화를 바꾸면서 사회 전체도 바뀌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변호사 개업 안 하는 이유

김 위원장은 대법관 퇴임 이후 여느 대법관과 다른 길을 걸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거나 대형 로펌에 들어가는 대신 대학 강단에 섰다.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공익변론 등 전직 대법관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건을 들고 후배들한테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이 조를 때 판사실에 한 번도 안 찾아가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더라. 실제로 재임 시절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더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냥 가시라’고만 대답했지만,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더라. 그래서 개업을 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2015년 말 자신이 참여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비평하는 책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펴내기도 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말이 철칙처럼 받아들여지는 법조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책에서 “대법원 판결이 사회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거스르거나 무시하는 결론을 내려서는 더 이상 존경받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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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서 원고인 두 베트남 여성이 재판부의 승소 판결 선고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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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는 다시금 ‘쓴소리’를 준비 중이다. 2010년 이후 화제가 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6편을 모아 비평글을 집필하고 있다.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를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제한한 판결(2013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통상임금 소급 적용을 불허할 수 있다는 판결(2013년) 등 한국 사회의 갈등을 응집한 판결을 두루 살필 계획이다.

이 비평집에는 지난 5년간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예비 법조인’들과 함께 호흡한 경험도 녹아들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매주 금요일 ‘판례실무연구’ 강의에서 학생들과 함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30여건을 돌아보고 있다. “강의 때마다 학생들이 던진 물음표는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고 했다.

2015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대한 판결도 그중 하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무죄 판단 없이 13명 만장일치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정치 개입을 유죄로 판단한 항소심을 파기했다.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로 꼽힌 주요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판결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됐다.

“증거능력이 중요해서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정도라면 주요 쟁점을 보다 상세히 설명했어야 한다. 반대 견해라도 있든가. 처음부터 증거능력이 없다고 하려면 자세히 설명을 해줘야 한다. 전원합의체 판단이 옳다 그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왜 전원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는 얘기다.” 김영란법을 지켜본 시민들은 이제 ‘김영란 수능’이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 기다리고 있다. 한국 사회가 그의 이름을 빌릴 일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가 이 사회가 그만큼 더 성숙해졌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확인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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