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뒤 30년째 정신병동에서 생활한 여성도
또다른 여성은 피해 6년 뒤 분신해 결국 숨져
진상규명위, 5·18 성폭력 진상 철저히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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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아이를 출산한 피해 여성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 여성은 정부 공동조사단이 31일 발표한 5·18 성폭력 피해 사례 17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5·18 특별법에 따라 출범할 진상규명위원회가 5·18 성폭력 범죄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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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얼마 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ㄱ씨는 성폭행범이 “밥데기를 달았던 군인”(위관장교)으로 기억했다. 그는 “임신 3~4개월이 됐을 때 배가 불러오니까 주인집 언니가 물었지만 말을 않고 있다가 시기를 놓쳐 버렸다”고 진술했다. ㄱ씨는 1981년 1월21일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생활고로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부득이하게 ㄱ씨는 2월21일께 보자기에 싼 아이를 이름이 적힌 쪽지와 함께 동구 지원동의 대한복지회 정문 앞에 두고 돌아왔다. 5·18보상심의위원회는 1998년 대한복지회에 문의한 결과 쪽지에 이름이 적힌 아이가 위탁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5·18 보상을 받았던 ㄱ씨는 200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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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째 정신병동 생활 이날 공동조사단이 공개한 피해자 중에는 30년째 정신병동에서 사는 ㄴ씨(1958년생)도 있다. 조사단이 문헌·자료 분석을 통해 찾아낸 ㄴ씨는 1980년 5월20일 새벽 언니 집에서 잠을 자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장한 공수부대원에게 붙들려 ‘폭행’ 당했다. 목격자 정아무개씨는 “당시 군인 2명이 ㄴ씨를 이웃집 대문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이 계집을 아침 되면 집으로 보내라’라고 하면서 가버렸다. 벌벌 떨고 있어 내가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진술했다.
ㄴ씨는 이후 정신이상 증상을 보였다. 1982년 7월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3개월 뒤 잠깐 집에 돌아왔지만, 얼마 뒤 가출해 1983년 11월 광주 용산동 은성원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요양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ㄴ씨는 다시 집을 나가 1986년 대구 시립희망원에서 발견됐다. 이후 ㄴ씨는 1988년 4월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지금까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 5·18 상처 입고 분신 이번 조사에서 피해자로 분류된 또 한 명의 여성도 5·18의 상처로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ㄷ씨(1962년생)씨는 1986년 12월3일 전남의 한 소도시 집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가족들이 구급차를 불러 광주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기도가 막혀 황망하게 세상을 떴다. 25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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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양은 이후 광주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1983년 여름 고향집에 왔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전 잘못한 것이 없어요.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ㄷ양은 손으로 땅바닥을 후벼 파는가 하면, 손바닥을 문지르며 비는 시늉을 했다. 1985년 7월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한 ㄷ양은 문장완성 검사지에 육필로 소망을 남겼다.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이라는 문항에 그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이라고 꼭꼭 눌러썼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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