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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단독] 5·18때 진압 장교에 성폭행당한 뒤 출산한 여성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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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대 여성 “남자아이 낳은 뒤 복지회에 맡겨”

성폭행 뒤 30년째 정신병동에서 생활한 여성도

또다른 여성은 피해 6년 뒤 분신해 결국 숨져

진상규명위, 5·18 성폭력 진상 철저히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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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아이를 출산한 피해 여성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 여성은 정부 공동조사단이 31일 발표한 5·18 성폭력 피해 사례 17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5·18 특별법에 따라 출범할 진상규명위원회가 5·18 성폭력 범죄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성폭행 피해 뒤 출산까지 31일 <한겨레>가 입수한 5·18 민주화운동 보상 심의 자료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장교한테 성폭행을 당해 출산을 했다는 ㄱ(1953년생)씨의 피해 진술이 담겨 있다. 진술서를 보면 1980년 5월18일 저녁 7~8시께 ㄱ씨가 가정부로 일하던 광주시 동구 대인동 한 집에 한 무리의 군인이 들이닥쳤다. ㄱ씨가 일하던 가정집은 5월18일 당일 공수특전부대 군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이었다. ㄱ씨는 진술 조서에서 “5·18 당시 갑자기 대문을 열라며 발길질을 해 문을 열어줬더니 군인들이 느닷없이 들어와 뒷방으로 끌고 갔다”고 진술했다. 이 가운데 군인 1명이 대검이 꽂힌 총을 들이밀며 협박하고 겁에 질려 있던 ㄱ씨를 성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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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얼마 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ㄱ씨는 성폭행범이 “밥데기를 달았던 군인”(위관장교)으로 기억했다. 그는 “임신 3~4개월이 됐을 때 배가 불러오니까 주인집 언니가 물었지만 말을 않고 있다가 시기를 놓쳐 버렸다”고 진술했다. ㄱ씨는 1981년 1월21일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하지만 생활고로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 부득이하게 ㄱ씨는 2월21일께 보자기에 싼 아이를 이름이 적힌 쪽지와 함께 동구 지원동의 대한복지회 정문 앞에 두고 돌아왔다. 5·18보상심의위원회는 1998년 대한복지회에 문의한 결과 쪽지에 이름이 적힌 아이가 위탁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5·18 보상을 받았던 ㄱ씨는 2008년 사망했다.

ㄱ씨는 5·18 민주화운동 때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심의 과정에서 ‘부상자’로 분류됐다. 5·18 민주화운동 보상 체계 분류엔 사망·상이·행방불명 등 세가지 피해 유형만 있을 뿐 성폭력 피해자는 별도의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이날 밝힌 5·18 성폭행 범죄 17건(중복 제외)의 피해자 중 4명도 보상 신청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5·18 성폭력 피해자 중 보상을 받은 2명은 정신질환 병력을 인정받아 가능했다. 공동조사단 박은정 조사관은 “성폭력은 목격자가 없고 병원에 갈 상황도 아니어서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새로운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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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째 정신병동 생활 이날 공동조사단이 공개한 피해자 중에는 30년째 정신병동에서 사는 ㄴ씨(1958년생)도 있다. 조사단이 문헌·자료 분석을 통해 찾아낸 ㄴ씨는 1980년 5월20일 새벽 언니 집에서 잠을 자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장한 공수부대원에게 붙들려 ‘폭행’ 당했다. 목격자 정아무개씨는 “당시 군인 2명이 ㄴ씨를 이웃집 대문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이 계집을 아침 되면 집으로 보내라’라고 하면서 가버렸다. 벌벌 떨고 있어 내가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진술했다.

ㄴ씨는 이후 정신이상 증상을 보였다. 1982년 7월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3개월 뒤 잠깐 집에 돌아왔지만, 얼마 뒤 가출해 1983년 11월 광주 용산동 은성원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요양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ㄴ씨는 다시 집을 나가 1986년 대구 시립희망원에서 발견됐다. 이후 ㄴ씨는 1988년 4월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지금까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 5·18 상처 입고 분신 이번 조사에서 피해자로 분류된 또 한 명의 여성도 5·18의 상처로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ㄷ씨(1962년생)씨는 1986년 12월3일 전남의 한 소도시 집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가족들이 구급차를 불러 광주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기도가 막혀 황망하게 세상을 떴다. 25살 때였다.

1980년 5월 여고 3학년이었던 ㄷ양은 고향을 떠나 광주시 남구 백운동에서 친오빠와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ㄷ양은 5월19일 시내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실려 숲속으로 끌려갔다. 살려달라며 비는 ㄷ양에게 군인들은 “너, 연락군이지?”라고 위협한 뒤 돌아가며 성폭행했다. 군인들은 ㄷ양을 차에 태워 시 외곽의 길거리에 버리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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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양은 이후 광주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1983년 여름 고향집에 왔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전 잘못한 것이 없어요.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ㄷ양은 손으로 땅바닥을 후벼 파는가 하면, 손바닥을 문지르며 비는 시늉을 했다. 1985년 7월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한 ㄷ양은 문장완성 검사지에 육필로 소망을 남겼다.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이라는 문항에 그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이라고 꼭꼭 눌러썼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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