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5월 한국사회는 텔레그램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n번방 사건에 대한 충격과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국회는 n번방 방지법을, 법원은 디지털 성폭력을 엄하게 처벌하는 양형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주범인 조주빈(대화명 ‘박사’)은 1심에서 징역 45년, 문형욱(대화명 ‘갓갓’)은 징역 3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요?
텔레그램에서 디스코드 등으로, 성착취물은 플랫폼만 바꿔 여전히 공유되고 있습니다.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을 악마로 치부하거나, 희화화하는 움직임도 포착됩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 n번방과 싸웠던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n번방 그 후’, n번방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n번방 그 후③
지난 2일 게임용 음성 채팅 메신저인 디스코드에 접속했다. 서버(방) 검색 게시판에 들어가니 인기 태그에 ‘야동’ ‘19(금)’ ‘섹스’ ‘자위’ ‘노예’ 등이 바로 보였다. ‘중딩’ ‘고딩’ 태그가 붙은 서버에도 어김없이 ‘19(금)’이 달려있었다. 각 태그가 붙은 서버 개수를 합하면 800개가 넘었다.
“프리미엄 야동방입니다. 크게는 15만원에서 작게는 2만원까지 판매합니다. n, 박사(n번방, 박사방) 자료 판매중입니다. 들어와주세요!” 한 서버엔 이런 소개글이 달려있었다. 서버에 들어가니 운영자는 성착취물을 ‘프리미엄 10만원’ ‘프리미엄 5만원’으로 나눠 판매하고 있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불법촬영 등 각종 성착취 영상을 ‘묶음’으로 팔았다. ‘프리미엄 5만원’의 크기는 총 10.9TB(9만8462개 파일), ‘프리미엄 10만원’은 총 15.6TB(18만3682개 파일)에 달했다. 운영자는 ‘프리미엄 10만원’을 “5만원에 할인한다”며 “지금 구매하면 7TB를 더 드린다”고 홍보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한 해는 디지털 성폭력과의 전면전이었다. ‘잡히지 않는다’며 비웃던 가해자들은 무더기로 체포됐다. 조주빈이 검거된 지도 지난달 16일로 1년이 지났고, 경찰 디지털성범죄특별수사본부는 지난해 12월31일 활동을 종료하기까지 3600여명을 검거했다. 조씨, 문형욱(갓갓) 등 주범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디지털 성폭력은 여전히 여러 플랫폼에서 계속되고 있다. 기자가 살펴본 디스코드 외에도 ‘소라넷 복사판’이라 불린 사이트 ‘○○일보’, 다크웹 등에서 성착취물이 유포되고 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가 지난 1월 공개한 2020년 피해상담 통계를 보면 비동의 유포 피해의 32.4%가 카카오톡·라인·텔레그램 등 메신저에서, 30.8%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불법 포르노 사이트를 통해 벌어졌다.
n번방 사건을 최초로 추적·보도한 ‘추적단 불꽃’은 지난달 25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n번방 1년, 남은 질문들’ 연재를 시작하며 “텔레그램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가해자들은 디스코드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플랫폼을 넘나들며 더욱 지독해진 수법으로 가해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21년, 텔레그램은 성착취물 공유의 ‘허브’이며 다른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성착취물의 충실한 ‘영업장’이자 ‘유통망’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2020년 5월 성신여대입구역 개찰구 앞 철문에 붙은 디지털 성범죄 근절 릴레이 포스트잇. 성신여대 페미니즘 동아리 ‘디어시스터즈’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남성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n번방·박사방 사건 가해자들을 악마화하거나, 이 사건을 ‘특별한 범죄’로 치부하는 경향도 보인다.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면서도 본인의 행태는 이들과 비교될 수 없다고 여기고 처벌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한 남초 커뮤니티는 ‘후방주의’라는 게시판을 열어두고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부각한 사진이나 아프리카TV 여성 BJ들의 ‘벗방’ 영상을 클립 형태로 공유하고 있었다. 다른 남초 커뮤니티에선 “n번방 사건이 알려지기 전에 모르고 피해 성착취물을 내려받았다”며 조언을 구하거나, n번방·박사방 사건 주범들의 외모 순위를 세우며 사건을 희화화했다. 지난 4일 이곳에 “야짤러(야한 이미지를 그리거나 올리는 사람)들 조심해라”라는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최근에 야짤러 여럿이 잡혔다”며 “신고하면 수사하고 n번방 이후로 무죄든 유죄든 최소 약식 이상 재판까지 간다. 다들 무지함에 인생 버리지 마라”고 썼다. 그러자 “X같네. 2D 캐릭(캐릭터) 말고 낙태 문제에 저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ㅋㅋ”라는 댓글이 달렸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 연대자D는 “가해자들이 모이는 각종 인터넷 카페 등에서 ‘그래도 n번방 급은 아니지 않냐’ 등의 말이 나오고, n번방·박사방 등과 비교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며 “반작용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했다. 서승희 대표는 “‘○○일보’ 등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불법 촬영물 공유 사이트를 이용하면서도 ‘n번방 사건처럼 직접 협박하고 촬영을 갈취해내는 것만 아니면 돼. 그것만 아니면 폭력은 아니야’라고 선을 긋는다”며 “하지만 성폭력처벌법 14조에 소지·구입·저장·시청한 사람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는 조항이 신설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n번방 사건 이후 단시간내에 많은 제도적 변화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성착취물 제작·배포뿐 아니라 소지한 경우에도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성착취물 유포를 방치한 플랫폼 사업자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이 상향됐고, 청소년성보호법엔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의 발단으로 지목돼온 ‘온라인 그루밍’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경찰이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나 온라인 그루밍 등을 수사할 때 신분을 비공개·위장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법원엔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를 강하게 처벌하는 양형기준이 만들어졌다.
n번방에 맞서 싸워온 여성 단체의 활동가들은 바뀐 제도가 잘 정착하는지도 살펴야겠지만, 결국은 성착취물을 소비하는 문화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성착취물, 나아가 여성을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니라 상품이나 성적 도구로 취급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이상 피해자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가 강간·성매매 등 전통적인 성범죄와 함께 발생하는 점을 감안해 수사기관도 디지털 성범죄와 전통적 성범죄를 분리해 수사하는 관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
석희진 탁틴내일 활동가는 “인터넷을 통해서, 심지어 웹툰에서도 범행 방법을 학습하게 되는 게 현실”이라며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이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했는데, 잘못된 성인 문화를 청소년들이 필터링 없이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고 지적했다. 권현정 탁틴내일 부소장은 “여성의 신체 사진이나 불법 촬영물을 많이 소비하는 문화 때문에 촬영·유포가 강력한 협박의 수단이 되는 측면도 있다”며 “문화가 없어져야 여성들의 불안감이 없어질 수 있다”고 했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경찰에서 디지털 성범죄는 사이버수사대가, 강간·성매매 등 전통적 성범죄는 여성청소년계에서 수사한다”며 “디지털 성범죄는 강간, 성매매 등으로 심화되기 때문에 수사 주체를 분리할 경우 제대로 수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여전히 피해 아동·청소년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접촉하는 교사, 부모, 경찰의 인식은 달라졌나”라며 “사회 전반의 인식은 개정된 법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교육이나 범국민 광고 등 인식 개선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탁지영 기자 g0g0@khan.kr
이혜리 기자 lhr@khan.kr
갓갓 문형욱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들여다봤다. 집요한 위협의 정황이 드러나 있었다. 피해자가 견디다 못해 연락을 차단하면 타인의 변호로 연락을 시도했다. “(엄마한테) 니 딸이 자살한다고 해? 올려? 동네 다 소문내줘? 니 딸이 한 거?” https://t.co/or4sF7qAIr
— 플랫 (@flatflat38) May 7, 2021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 [인터랙티브] 김진숙을 만나다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프리미엄 유료 콘텐츠가 한 달간 무료~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